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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에콰도르 김찬구 동문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9-16
조회수 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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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에콰도르 김찬구 동문
관리자 2009-09-16 2378

에콰도르 한의사 김찬구 동문(어로학과 57학번)

“실천할 수 있는 큰 꿈을 지녀라” 김찬구 동문(좌로부터 첫번째)이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있는 자신의 한국침술의료원 앞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김찬구 동문(좌로부터 첫번째)이 에콰도르 수도 키토에 있는 자신의 한국침술의료원 앞에서 직원들과 포즈를 취했다. 

대북사업, 미국 교포선장 1호, 에콰도르 한의사…. 그의 인생을 요약하는 단어들이다. 이렇게 나열해 보니 다소 이질적이다. 그만큼 도전과 응전이 점철된 삶이다.

그는 부경대 전신 부산수산대 57학번으로 어로학과에 입학, 졸업 후 원양어선 항해사 및 선장으로 일했다. 마흔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그 곳에서 사업과 선장을 했다. 한동안은 대북사업에 심취했고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 현재는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한국침술의료원이라는 한의원을 개업해 활동하고 있다. 부경대 김찬구 동문(ckk3711@yahoo.co.kr) 얘기다.

학창시절 그는 학창시절 어로학과 학회지 ‘경양(耕洋)’을 창간해 발행했다. 또 학예부와 체육부를 신설해 초대 학예부장과 체육부장을 맡았다. 학과 학년 배지를 디자인하고, 교모에 금테 부착하는 등 ‘튀는’ 행동에 당시 대학본부측으로부터 눈총도 적잖이 받았단다. 김 동문은 “공부는 낙제만 안 할 정도로만 했고,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동기간의 화목과 학교 사랑을 전하는 것이었죠.”라고 했다.

김 선장 그의 블로그 아이디는 ‘김선장’이다. 단적으로 ‘나는 뱃사람이오’를 나타내는 아이디이다. 그런 그는 바다와 평생을 씨름해왔다. 지금은 바다를 떠나있지만, 마음은 늘 대양의 한 가운데 있다. 그의 블로그에 가득한 자료만 봐도 그렇다. 각종 어류 정보며 항구, 해양 생태계 등 정보가 빼곡하다.

그는 “제동산업에서 최초로 도입한 원양어선의 항해사로 첫 항해을 시작했던 일부터 남태평양 사모아로 출어해 참치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일 등 가슴 깊이 새겨진 소중한 추억.”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대국의 횡포로 국내 어장이 활개를 잃게 되자, 김 동문은 제2의 어장을 찾아 훌쩍 미국행을 선택했다.

무작정 미국으로 간다고 수산업을 할 수 있다고 보장된 것도 아니었지만 몇 년을 온갖 일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단다. 그의 열성을 하늘도 알아봤던 것인지 그는 결국 동부 뉴저지(가리비 어선), 남부 루이지아나(새우 어선), 서부 샌프란시스코(은대구 어선), 북부 시애틀과 알래스카(명태 어선) 등 미국 각지를 돌며 6년 동안 선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는 미국 교포 선장 1호란다. 그는 “그 때가 인생에서 더 없이 화려한 시기였다.”며, “수산대학을 나온 자랑스러운 나를 맘껏 즐겼다.”고 말하기도 했다.(더 자세한 내용은 김선장 불로그 kr.blog.yahoo.com/ckk3711 참조)

‘평양으로 갈까’ 그는 ‘평양으로 갈까’라는 제목으로 대북사업 내용이 담긴 연재칼럼을 월간조선에 게재하기도 했다. 지금도 이 칼럼은 인터넷 월간조선에 매월 연재 중이다. 대북사업? 개성공단 사업 등으로 최근에야 북한과 사업을 생각을 조금 해볼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즈음이니 사업을 할 생각도, 교류를 할 수 있는 여건은 더욱 아니였을 텐데 말이다.

김 동문이 새로운 어장 확보를 위해 구소련의 캄차카 연안어업에 진출하려고 모스크바 수산공사와 교섭하던 중에 어렵사리 초청을 받아 1988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시는 한국과 구소련과는 외교관계도 없던 때였다. 구소련은 인민에게 무상 배급 조건으로 북한 정부에게 매년 20십만 톤(명태 10만 톤, 기타 잡어 10만 톤)을 특징 시기에 조업하도록 허가했지만 실은 북한은 그 절반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김 동문은 “북한이 못 잡아가는 이 고기를 북한과 의논하여 잡아서 남한의 명태물량까지 해결하고 남한의 새로운 어장을 개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장 진출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실패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 대북사업의 화두를 던졌다. 결국 김 동문은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골뱅이 수입, △가리비 양식, △봉제완구공장, △㈜엘칸토 평양공장 추진 등 각종 대북 사업을 펼쳤다. 그는 2006년 그동안 대북사업 경험을 담아 ‘아, 평양’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한의사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을 찾아 쉴 새 없이 일을 하던 김 동문. 어느 날 노후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고 한다. 그 때 그는 한의사가 노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봉사하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 로얄한의과대학 야간반에 입학했다.

낮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지만 그는 지금 에콰도르에서 자신의 한의원 ‘한국침술의료원’을 통해 저렴한 치료비를 받고 현재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주말에는 원주민들에게 무료 봉사도 빼먹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이처럼 노후에 보람을 만끽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는 후배들에게 도전적인 삶을 살 것을 권유했다. 그는 “실천할 수 있는 큰 꿈을 가져야하며,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행동하라.”면서 “다양한 경험으로 추억을 많이 만든 학창시절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건강이 유지 되는 한 노후에 무엇으로 소일하며 봉사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을 꼭 마련하라.”고 권유했다.<부경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