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땅덩어리 중국의 혈자리 도시는?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10-30 |
| 조회수 | 445 | ||
| 거대한 땅덩어리 중국의 혈자리 도시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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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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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9회 시리즈 기사의 키워드는 ‘상하이’였다. 부경대 HK+사업단 안승웅 교수는 23일 국제신문 18면에 실린 ‘상하이의 바닷길이 막히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상하이라는 도시의 ‘열림’과 ‘닫힘’에 대해 소개했다. 안 교수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중국을 사람에 비유하면, 상하이는 이 거인의 중요한 혈자리에 해당한다.”면서, “(상하이는) 거대한 중국이 정상으로 유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북미 서해안, 일본, 중국, 동남아, 유럽을 왕래하는 윤선이라면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동북아해역 중심 도시 상하이의 바닷길이 막힌 적이 있었다.”면서, “중국을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라는 유기체의 한 구성조직으로 보지 않고 바다와 분리된 독립된 개체로 본 정치가 때문이었다.”고 소개했다. 안 교수가 말한 그 정치가는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었다. 안 교수는 “마오쩌둥이 공산당 최고위 지도부 중 해외 유학을 경험하지 않은 특이한 지식인이었다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그는 외국 지식을 아는 것만큼 중국 실상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유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실상에 맞게 농촌에서 시작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어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후 중국은 중·소 갈등, 미국의 대중봉쇄정책 등과 같은 국제 상황 탓에 죽(竹)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국가가 됐다. 여기에는 당시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혁명의 순수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국가 최고 지도자의 결정에 의해 중국이 죽의 장막을 치게 되자 세계 각국을 향해 열려 있던 상하이의 바닷길 또한 막혀버렸다.”고 밝혔다. 바닷길이 막히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안 교수는 “바닷길이 막히자 시대를 앞서 중국을 이끌었던 상하이의 역할도 사라졌다. 오히려 중국 역사를 되돌린 10년 동란, 문화대혁명이 상하이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1958년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실각한 마오쩌둥이 권토중래하려고 몸을 숨긴 곳은 고향이 아니라 상하이였다.”고 했다. 그 때 상하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안 교수는 “뱃길이 막힌 지 십수 년이 지나 혈자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하이였다. 상하이의 부패 권력은 상하이에 온 마오쩌둥의 명성을 이용해 더 큰 권력을 잡고자 집결했다.”고 전했다. 그는 “마오쩌둥은 상하이에서 이들 부패한 세력과 손잡고 사회주의 혁명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미명 하에 다시 권력을 잡을 준비를 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중국 현대사의 치부라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은 “1965년 사인방의 야오원위안이 상하이 ‘문회보’에서 ‘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역사극을 비판하면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상하이발 문화대혁명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방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10년간 정부 기능이 마비돼 국가 생산력이 저하됐으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학술 문화 분야에 메울 수 없는 공백이 생겼다.”면서, “근현대 선진 문물과 문화의 상징이던 상하이가 역사 흐름을 거스르는 반동의 도시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안 교수는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문화대혁명은 끝난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상하이는 이전 모습과 혈자리 역할을 다시 찾는다.”면서, “1992년 남순강화 이후 포동 지역이 경제특구로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상하이는 지금까지 중국 경제를 이끄는 중요한 혈자리 역할을 맡고 있다.”고 소개했다.<부경투데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