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주 전 총장의 조선통신사 이야기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6-09-26 |
| 조회수 | 9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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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주 전 총장, ‘한일관계 과거, 현재, 미래’ 특강
강 전 총장은 현재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학술위원회 한국측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3월 한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신청했는데, 강 전 총장이 이번 등재신청의 산파역을 맡았다. 이날 특별강연에서 강 전 총장은 “다음 세대에게 역사를 알게 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면서, 한일 관계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강 전 총장의 강연내용 중에서 조선통신사 부문을 발췌한 것이다. 조선통신사는 왜 갔으며, 규모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이번 기회에 부산을 출발해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던 조선통신사의 흥미진진한 내용을 접해보자. <강남주 전 총장 특별강연 중 조선통신사 부문 요지> 조선통신사 파견은 서로에게 필요했던 정치적, 시대적 요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조선의 경우, 북방의 위협이 계속되는 속에서 일본의 위협마저 있게 된다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조선통신사 파견을 통해 그런 부담을 덜겠다는 것이 속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 취임 때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특별한 초청이 있을 때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해서 축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l회와 2회, 3회 때는 사신들이 포로송환에 비중을 두고 활동했지만 4회째인 1636년부터는 문화와 예술교류에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말 등에서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며 말 몸뚱이 아래로 몸을 숨기는 마상재는 구경꾼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구경거리였습니다. 궁중에서 파견한 공식화가 김명국(金明國)이 현장에서 그린 그림은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 그림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림 요구가 많아 술을 마시고 취해서 그린 그림까지도 인기가 많았고, 술 취한 늙은이라는 뜻의 취옹(醉翁)이라는 호는 일본에 남아 있는 그의 그림에서 지금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가는 곳마다 일본의 문장가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했고, 그림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특히 주자학 등 학문을 일본 학자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靜岡가 일본 최초의 인삼재배지가 된 것도 그곳 사람들이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인삼재배의 방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의 의학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을 열심히 배웠고, 침을 놓는 방법, 뜸(灸)을 뜨는 방법도 조선통신사로부터 익혔습니다. 일본에는 아직도 당시 조선의 사신들과 어울려 추던 춤이 전승되고 있으며 특히 淸見寺(세이켄지)에는 조선통신사가 숙박을 하면서 남겨놓은 글씨와 그림이 지금껏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묵매화, 송하호도, 산수도와 같은 그림은 매우 귀중한 조선의 예술품으로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왕래는 정치적 의미 외에도 일본에 문화, 예술, 학술, 의학 등의 교류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조선통신사를 매우 환대했습니다. 몇 십 년 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는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 규모로 성대하게 환영했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사신 약 5백 명이 움직이는데 가마를 짊어지는 일본 사람, 말을 몰고 가는 사람, 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 길 안내를 하는 사람, 경비를 하는 사람 등을 합치면 행렬인원은 모두 3천명이 넘기도 했습니다. 그 행렬이 장관을 이루며 몇 시간에 걸쳐 거리를 지날 때는 모여든 구경꾼들이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비용은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떠나 에도를 방문하고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 올 때까지의 전액을 일본이 부담했습니다. 그 액수는 막부의 일 년 예산과 거의 맞먹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가 통과하는 지역의 번주는 정성껏 통신사 환영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대마도의 번주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의 시모노세키인 아카마세키에 조선통신사가 도착하면 당시의 관할지역인 長州(조슈)는 물론 주변의 다른 지역 번주까지 모여서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에서 대륙의 높은 학문을 전달하고 의술을 전했으며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예술을 폭넓게 교류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불편했던 한일관계 속에서 조선통신사는 이렇게 일본에서 최초의 한류바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겠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얻어온 바도 많았습니다. 흉년을 이길 수 있는 구황작물로서 고구마를 도입했고, 가뭄을 극복할 수 있는 물레방아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빈한할 것으로 알았던 일본이 항구마다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유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배운 바가 많았습니다. 공소한 이론으로 갑론을박하면서 당파싸움이나 하는 조선보다 실사구시정신이 백성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통신사는 정치문제이나 경제문제의 갈등해결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사절단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에 경사가 있을 때 일본의 국왕사가 방문을 했던 것처럼 일본에서 경사가 있을 때 조선통신사가 그 경사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가끔은 조선통신사가 조공사절(朝貢使節)이라는 말이 일본 안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표현이었고 틀린 말이었습니다. 조공사절 이야기는 당시 일본 안의 일부에서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서 만들어낸 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최고 실권자인 국왕과 막부장군이 서로 주고받은 국서를 보면 조공사절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음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이 불구대천의 원수관계가 되어 있을 때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문화교류를 함으로써 전쟁의 재발을 막은 평화교류사절단이었습니다. 마지막 12번째 사절단 3백 명 정도가 대마도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 번에 대략 5백 명 정도의 사절단이 일본을 왕래했습니다. 한 번 갔다 오는 데는 반년에서 일 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부산을 떠나 바닷길로 오사카까지, 거기서는 육로로 에도까지 갔다 왔습니다. 그 먼 여정은 때로는 즐거웠지만 힘든 일이 더 많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중간에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지는 위험도 겪었습니다. 장기간 항해에 병이나서 죽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고사 또는 일본인에 의해서 사행원이 피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사행원들은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부산을 떠나서 부산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전 과정을 일기형식 또는 시문으로 남긴 각종 사행록은 조선통신사를 이해하고 당시의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보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조상의 기록문화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길이 보존하면서 공부해야 할 자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