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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부경대 교환실 김원봉 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3-07-30
조회수 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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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부경대 교환실 김원봉 씨
관리자 2003-07-30 4925
7월30일자 국제신문은 <이 사람의 삶>이라는 코너에 우리 대학 교환실에 근무하는 김원봉 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게재, 부산지역 최고참 교환원으로 도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씨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그 기사를 소개합니다.<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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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부경대 교환원 김원봉 씨, "뭘 도와드릴까요", 전화지기 33년

<화제의 인물>부경대 교환실 김원봉 씨
“상대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학교를 찾는 손님들에게 우리 대학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도록 최대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33년째 부경대 전화교환실을 지키고 있는 교환원 김원봉(52)씨.

그는 부산지역 공공기관의 전화교환원 가운데 현역 최고참이자 부경대 교직원 380여명 중에서도 최장기 근속자이다.

여고 3학년이던 1971년 11월 부경대 전신인 부산수산대 교환실에 첫발을 내디딘 후 머리가 희끗하게 된 중년이 되도록 교환대를 지키고 있는 것.

지금은 교환시스템이 자동화돼 비인기 직종이 됐지만 여성 취업문이 좁았던 1970년대초에는 교환원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취직하기 어렵고 인기있는 직업이었다.

교환원 직업이 갈수록 비인기 직종으로 전락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교환대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의 어깨에 걸린 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7남매 중 둘째인 김씨는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고향(경남 남해)에서 다섯명의 동생을 부산으로 데려온 뒤 공부시켜 은행원 공무원 등 중견 사회인으로 성장하도록 뒷바라지 했다. 동생들 뒷바라지는 그가 결혼(1978년)한 뒤에도 계속됐다.

지난 70, 80년대 고도성장 시대의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자신을 희생,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는 고단한 ‘누나의 삶’을 살아야 했다.

김씨는 그런 누나의 마음을 가난한 남의 동생들에게도 나눠줬다.

지금은 교직원과 학생수가 2만7천명에 달하는 매머드 대학으로 성장한 부경대지만 1970년대엔 학생수가 200여명에 불과해 교직원과 학생들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지낼 정도로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하숙비나 자취방 월세를 내지 못해 도서관과 학과 사무실을 전전하던 학생들에게 동료들과 월급을 쪼개 도와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남몰래 도와줬던 대학생들로부터 감사전화를 받을 때 교환원이 된 보람을 더 없이 느낀다는 그는 이같은 전화 한 통화가 33년째 교환실을 지키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김씨는 대학입시 후 시골 벽지 수험생에게 합격통보 전화를 했을 때 기뻐하던 수험생으로부터 감사전화가 걸려 오고, 더러는 입학식날 교환실까지 찾아와 인사를 하던 장면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추억이 됐다고 회고한다.

30여년을 대학에서 생활하면서도 늘 그의 마음을 짓눌러 왔던 대학공부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어 마흔여덟살 되던 1999년 봄 방송대 일본어과에 진학했다.

올 봄에 졸업과 함께 일본어 능력시험에서 3급 자격을 취득한데 이어 2급 자격시험에 도전중인 그는 동시통역사가 되겠다며 일본어 공부에 푹 빠져 있다.

김씨는 “퇴근 뒤에는 물론 일요일에도 도서관에 나가 공부한 지난 4년간 한마디 불평도 없이 배려해준 남편이 고맙다”며 “정년퇴직 후에는 사회복지사를 꿈꾸는 대학생 딸과 함께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조수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