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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캠퍼스 돌집 사연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5-01-25
조회수 8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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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캠퍼스 돌집 사연은?
관리자 2005-01-25 8031
아래 기사는 대연캠퍼스 돌집 유래에 대해 사학과 이승영 교수님이 부경저널 <줌 인 캠퍼스> 코너에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전쟁, 가장 긴박했던 18일간의 美사령부 자리 돌집의 유래를 설명하는 사학과 이승영 교수. ▶돌집의 유래를 설명하는 사학과 이승영 교수. ⓒ이성재 사진(홍보팀) 대연 캠퍼스 종합 강의동의 동편 소나무 밭에 돌집이 한 채 있다. 건물 넓이는 약 100평 정도로 지붕이 나지막하고, 돌벽 직경은 1척은 좋이 되어 보인다. 지상(地上)의 벙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집. 어떤 이들은 특이한 건축 양식 때문에 그 유래를 묻곤 했다. 이 건물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한국전쟁 당시 미사령부 건물로 사용된 대연캠퍼스 돌집. ▶한국전쟁 당시 미사령부 건물로 사용된 대연캠퍼스 돌집. ⓒ이성재 사진(홍보팀) 전하는 말로는 돌집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Walton H. Walker)과 그의 참모들의 숙사(宿舍)로 쓰였다고 한다. 1950년 7월20일 우리 대학은 제103 미군 야전병원에 교사(校舍)를 비워줘야만 했다. 이 돌집은 이 후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야전 병원이 철수한 후에는 민사원조처(C A C)와 스웨덴 병원이 차례로 교사(校舍)를 차지하였다. 대학 당국이 교사와 캠퍼스를 완전히 돌려받은 것은 1957년 9월 25일이었다. 그 후 돌집은 교수, 학생 식당으로 쓰이다 1981년 5월 식당이 지금의 학생회관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는 동아리가 차지하였다. 그런데 90년 여름에 큰 화재가 일어나 돌집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1995년 당시 장선덕 총장은 돌집 복구계획을 세웠다. 이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여 워커 장군의 유물을 전시, 인근 유엔공원을 찾는 방문객들을 유치하여 대학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려고 했다. 필자와 이원균 교수가 돌집 내력을 밝히는 일을 맡게 되었다. 자료를 찾아 육군 전사편찬실과 미 8군 전사과(戰史課) 등을 방문했다. 8군 전사관 루쏘 소령은 기념관 건립에 아주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나중에 미 국방성 및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의 소장 자료를 보내오기도 했다. 1995년 9월 29일 지금의 돌집이 준공되었다. 전시관 준비도 순조롭게 진척되어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이 거센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남침을 개시했다. 그들은 파죽지세 남진, 7월 말에는 낙동강 강변에 포진했다. 워커 장군은 포항부근의 해안을 북쪽 경계선으로, 진주 마산 지역을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방어선을 그었다. 그리고 모든 전선의 한 미군에게 8월 1일까지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렸다. 이제 아군은 적군의 어떠한 압력을 받는다 하더라도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8월 첫째 주에 미 해병 제 1사단이 작전을 개시하여 마침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전선은 그때부터 8월 말까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김일성은 8월을 ‘완전 승리의 달’로 선포하고, 조국 통일을 달성하라는 성화같은 독전령을 내렸다. 인민군은 대공세를 펼쳐서 2주 동안 한 미 연합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인민군 3개 대대가 중앙지구에서 낙동강을 건넜으며, 포항과 진주를 점령하였다. 9월 초에 인민군이 다시 경주, 마산, 대구를 위협하였으므로 부산 방어권(Pusan Perimeter)은 거의 무너질 듯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9월 4일 8군 참모들은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으로 후퇴하자는 논의까지 벌였으나, 그날 밤 워커 장군은 철수 계획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9월 6일에 8군 사령부만을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으로 이동하였다. 그 이유는 텔레타이프 통신자비를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만일 그것이 파손되거나 적군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극동지역에서는 그러한 장비를 당장 구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8군 사령부가 부산수산대에 머물렀던 기간은 18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간 낙동강 방어선은 가장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워커는 기본적인 낙동강 방어 전략을 ‘기동방어(Mobile Defense)에 두고 있었다. 즉 취약한 방어선에 예비 병력이나 인근 부대의 병력을 차출하여 긴급 투입, 병력의 열세를 커버하는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커가 늘 일선을 자주 방문 하였던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한 가지는 ‘정확한 현황 파악’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이었다. 그는 격전지에 어김없이 나타나서 총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부대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던 것이다. 그가 받은 세 개의 은성무공훈장 사유서에도 그의 지두지휘와 탁월한 기동작전이 언급되고 있다. 워커가 야전 지프를 몰면서 낙동강 전선을 미친 듯이 누비고 다녔던 사실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이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23일 24사단에 복무중인 25세의 대위인 아들 쌤 심스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달아주려고 식장으로 가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사흘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맥아더 원수는 그의 대장 승진을 며칠 전에 상신 해놓은 상황이었다. 제 1차 대전 때 대대장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제 2차 대전 때는 군단장으로서 프랑스, 도이치,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민첩한 작전과 용맹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그가 사고사(事故死)로 42년간의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였다.<부경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