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년의 스타, 김봉조를 만나다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5-08-31 |
| 조회수 | 2225 | ||
| 왕년의 스타, 김봉조를 만나다 | |||||
![]() |
대외협력과 | ![]() |
2015-08-31 | ![]() |
2225 |
|
“수영하는 사람은 자기가 다 잘났어. 고집이 세요. 자기밖에 몰라.” 평생 수영을 한 그가 자신의 얘기를 마치 남의 얘기 하듯 그렇게 말했다. 왕년의 ‘수영 스타’ 김봉조 말이다.
그는 선이 굵은 사람이었다. 고희를 앞둔 나이(69세)지만 매서운 눈매, 툭툭 던지는 쉰 목소리의 말투, 견고한 어깨, 다부진 몸피에서 상대방을 누르는 힘이 느껴졌다. 김봉조가 누구인가? 청년시절이었던 1960년대 대한민국 수영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고, 장년기에는 수영 국가대표 감독을 지내며 마린보이 박태환 같은 세계적인 스타를 발굴해 키워낸 장본인이다. 수영계에서는 10년마다 1명씩의 수영 스타를 꼽을 때 2000년대 박태환 → 1990년대 지상준 → 1980년대 최윤희 → 1970년대 조오련 → 1960년대 김봉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수영 국가대표 선수 해외전지훈련(사이판) 때의 일화를 박태환 선수의 자서전적 에세이집인 『프리스타일 히어로』를 통해 들여다보자. 박태환 선수는 이 책에서 “처음 국가대표가 되어 해외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아테네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도무지 선수들의 기록이 좋아지지 않았다. 화가 난 김봉조 기술력 향상위원장님이 훈련 분위기를 바꾸겠다며 지옥훈련을 선언했다.”고 밝혔다. 박태환 선수는 “그날 이후 나는 훈련에서 100% 몰입하는 법을 터득했고, 녹초가 되는 재미를 들였다. 그날의 10,000m 완주로 나는 감독님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최연소로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고 돌이켰다. 특히 박 선수의 재능을 제대로 끄집어내어 빛내려면 당시의 국가 시스템보다 기업의 대형 스폰서 투자가 절실하다고 판단, ‘월드스타 탄생 프로젝트 사업’을 최초로 기획해 밀어붙인 이도 바로 김 감독이었다. 박 선수에 앞서 그는 부산아시안게임(2002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1991년), 베이징아시안게임(1990년) 등 각종 국제 경기에서 수영 국가대표 감독으로 활약하며 지상준, 김민석 선수 같은 월드 스타들을 조련해낸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후로도 그는 수영감독 및 수영국제심판, MBC와 SBS 같은 방송국의 수영해설위원 등으로 활약해왔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평안북도 강계가 고향인 그는 서울대 치대 출신의 치과의사이던 부친이 공산주의에 맞서 투쟁을 하다 공산당에 의해 희생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고 한다. 집안이 가난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던 그에게 운동은 희망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운동을 하면 밥은 굶지 않았다. 운동선수들에게는 고기도 사주고 밥도 든든하게 먹여주니까.” 체격이 좋았던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선배들에게 눈에 띄어 수영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서울 오산중·고 시절 ‘수영선수 김봉조’는 청춘스타였다. 고 1때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 고3 때는 동경올림픽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고교생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나간 것은 그가 국내 최초였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실내 수영장이 한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국가대표라 해도 여름 3개월 정도만 야외 풀에서 훈련해야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한국 신기록을 39회나 갈아치운 주인공이 바로 김봉조였다. 1961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선수상 3명은 바로 수영의 김봉조, 야구의 백인천, 축구의 함흥철이었다. 1965년 즈음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것이 국정 목표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부경대는 당시 국가로부터 중요한 미션을 부여받는다. 바다를 개척해 외화를 획득하라.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1964년 부경대의 실습선박 ‘백경호’가 건조됐다. 이 배를 만드는 데 그 해 국가 예산의 1/1000이 투입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배 이름을 직접 붓글씨로 썼다. 육영수 여사가 진수식에 참석했다. 그만큼 백경호 건조는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 이 선박의 힘으로 우리나라는 원양어업을 처음 개척했다. 원양에서 잡은 참치(사실 당시 우리 국민들은 참치가 어떻게 생긴 고기인지조차 까맣게 모르던 시절이었다)가 우리의 식탁에 처음 올라오게 된 것도, 북태평양에서 헤엄치던 명태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다 이 백경호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다. 자, 다시 인터뷰로 돌아가자.
그는 “그 때는 지금과는 달리 아무나 외국에 나갈 수도 없었고,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집으로 달러를 송금하던 것을 보면서 나도 원양어선 선장이 되면 돈도 많이 벌고 외국에 나가서 기개를 펴고 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난한 청년 김봉조’는 그 로망을 이루고 싶었다. 부경대가 그 꿈의 섬돌이 되어줄 것 같았다. 수영부를 창단한 부경대 측의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다. 그는 부산 남구 대연동에 있는 부경대 정문 앞에 있는 집에서 자취를 하면서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 도중 불쑥 그가 “그 당시 학교 강의실이 시체 보관실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경대는 한국전쟁 당시 교사(校舍)가 미군야전병원, 스웨덴병원 등으로 징발당해 7년 동안이나 병원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 흔적들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학교 주변은 허허벌판이었고, 선배들은 어찌나 기합을 심하게 주는지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참고 공부했다. 자취방의 월세를 못내 쫓겨나는 어려움까지 꼭꼭 견디며 공부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세계유니버시아드 국가대표 선수로도 출전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활약으로 부경대 수영부가 각종 대회에 우승을 하면 수영 명문을 자처하던 서울 사립대들은 비상이 걸리고 했다고 한다. 부경대가 그의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는 대학시절 해군 ROTC에 지원했다. 전국 최초로 창단(1954년)된 역사를 가진 부경대 해군 ROTC에서 그는 대대장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해군장교로, 태창수산 소속 참치어선 선장으로 대양을 누볐다. 그 후 김봉조 선장은 브릿지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수산회사의 스페인, 브라질 주재 기지장으로 해외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원대로 ‘외국물’을 실컷 먹고 1983년 귀국한 그는 수산회사를 직접 차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불현듯 건국대 교육대학원 체육학과로 진학했다.
이렇게 2시간 쯤 그와 마주앉아 그의 인생의 주요 대목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물과 뗄 수 없는 운명.”이라고 했다. 수영선수→부경대→해군장교→선장→수영감독으로 이어지는 곳에 언제나 물이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의 궤적을 떠받쳐주는 대목은 바로 부경대였다. 그는 “부경대에서 리더십을 배웠고, 내성적이었던 성격도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부경대가 몸속에 심어준 이런 자산은 나중에 그를 국가대표 감독으로, 대한수영연맹 전무이사로, 경기력 향상 위원장 등으로 우리나라 수영발전을 위해 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박태환을 조련한 사람이니까, 그에게 누구라도 수영을 잘 할 수 있는 팁을 몇 가지 달라고 부탁해보았다. <발차기 포인트> 양쪽 엄지발가락이 서로 살짝 비켜가듯 발을 차라. 다리에 힘을 빼고 회초리처럼 흔들어라. 하체에 맞추지 말고, 상체를 따라가라. <물 잡기 포인트> 다섯 손가락을 딱 붙여라. 물에 손을 넣자마자 당기는 것이 아니라 물을 누르면서 몸을 띄운다는 느낌으로, S자로 물을 쓰다듬어라. 대퇴부를 쓰다듬으면서 팔을 돌려라. 그래야 물이 새지 않는다.
이 글의 모두에 그는 “수영 같은 개인 운동을 하는 사람은 보통 고집이 세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건 그만큼 그 사람에게 근성이 있다는 말이다. 근성을 길러주고 인내력을 높여주는 운동으로 수영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수영선수와 감독 출신답게 그는 “가능한 원칙대로, 주어진 룰을 잘 지키며 살고 쓸데없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면 결과가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지금 그는 재단법인 남강문화재단 이사장, ㈜그리쉼 대표이사를 맡고 있고, 부경대학교 재경 동창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힘이 넘쳤고, 삶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왕년의 수영 스타 김봉조, 그는 건재했다.<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