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란을 돌아보다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5-09-03 |
조회수 | 1458 |
호란을 돌아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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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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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 CEO행복 인문학 콘서트’의 일곱 번째 강의가 9월 3일 오전 7시부터 2시간여 동안 부경대 미래관 2층 소민홀에서 열렸다.
한 교수는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복배수적(腹背受敵)’의 형국.”이라면서,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기존의 패권국과 신흥 강국이 대결할 때마다 한반도는 큰 위기에 처해야만 했던 역사적 경험을 오늘날 되새겨야한다.”고 말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그 대표적 사례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한 교수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명나라가 왜란에 한 눈을 파는 사이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급성장해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한다. 금은 북송을 멸망시키고 남송마저 위협한다. 패권국과 신흥 강국의 대결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논리로 조선을 내세워 누르하치를 견제하려한다. 이른바 이이제의(以夷制夷)였다.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란 때 전쟁을 지휘하기도 했던 광해군은 이이제이를 거부하고 중립외교를 고수한다. 힘의 균형이 가까스로 유지되는 듯 했다. 그러나 1623년 친명파(親明派)의 쿠데타(인조반정)로 광해군이 쫓겨나게 된다. 이후 한반도 정세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후금은 조선의 친명정책, 명나라의 생필품 수출금지 등으로 식량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한 후금의 조선 침략이 1627년의 정묘호란이다. 이 전쟁으로 인조는 강화도로 쫓겨 가는 등 궁지에 처한다. 결국 조선은 후금과 식량무역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미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어 신하 나라였던 조선은 후금에게는 동생의 나라가 되는 수모를 당한다. 한 교수는 “당시 조선이 양자에게 눈치를 보는 상황과 지금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한반도는 중국의 경제궤도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고,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과 동맹관계.”라면서, “그러나 끼어있는 약소국이 양자와 잘 지내려 노력해도 두 나라에 분쟁이 생기면 그 사이에서 원치 않는 비극을 겪게 된다는 것을 상기해야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센가쿠 열도를 둘러싼 중·일 분쟁으로 인한 국지전 가능성, 여기에 미국이 일본 쪽으로 개입하면서 주한미군을 움직일 가능성, 그 후 북한의 움직임 등이 그것.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즈음 명나라와 후금은 분쟁 중이었다. 명은 후금의 공격에 연전연패했다. 기세가 높아진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도 명처럼 조선에 대해 황제국가임을 선언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선은 청나라와의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병자호란,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이 전쟁으로 부녀자들을 비롯한 수십 만 명의 백성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서울서 청나라까지 800㎞. 가는 도중에만 얼어 죽고, 맞아죽고, 굶어죽는 비극이 속출했다.
그 후 을사늑약 등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역사는 한반도의 비극을 극대화시켰다는 것은 모두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한편 부경 CEO행복 인문학 콘서트 8강은 서울대 철학과 이태수 교수의 ‘훌륭한 삶, 행복한 삶’로 이어진다. 9월 10일 오전 7시 부경대 미래관 소민홀. 강의 참여문의: 부경대 기획처 대외협력과(051-629-5091∼8)<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