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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본 김재철 회장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6-03-08
조회수 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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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본 김재철 회장
대외협력과 2016-03-08 2634

조선일보 3월 7일자 28면에 부경가족에게 낯익은 얼굴이 크게 나왔다. 부경대 동문(어업학과 54학번)이자, 부경대 명예총장으로 뛰고 있는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었다.


△ 한 학생이 조선일보에 실린 김재철 회장의 기사를 읽고 있다. ⓒ사진 이성재(홍보팀)

올해 여든둘의 김 회장은 엽서만한 크기의 사진 속에서 조금 쑥스러운 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툼한 책 한권을 품에 꼭 껴안은 채.

그 책이 최근 나온 「김재철 평전」이다. ‘파도를 헤쳐온 삶과 사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21세기북스 발간).

이 평전은 평소 주위에 자기자랑을 싫어한다는 김 회장 성격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나왔다는 점, 경제경영분야 전문가로 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공병호 박사가 1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조사하고 연구하여 집필을 맡았다는 점에서 벌써 출판독서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조선일보의 이날 기사도 김 회장의 평전 발간이 계기였다. 코너는 ‘최보식이 만난 사람’이었는데, 신문 하단 광고를 뺀 나머지 ‘10단통’에 이르는 와이드 인터뷰였다.

최보식 기자는 “(평전 내용 중에)‘다른 창업자들이 육지를 기반으로 제조·건설·유통업을 일으켰다면 그는 망망대해에서 시작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사를 시작했다. 


△ 김재철 평전.
태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일렁이는 험난한 바다니까 육지보다 도전하고 모험하기 더 힘들었다는 짧은 문장에 담겨있을 어떤 깊은 사연을 감지해냈던 것이다.

최 기자는 김 회장이 부경대 전신 부산수산대를 졸업한 뒤 ‘자청해서 월급도 받지 않고’ ‘선사 측에 간곡하게 애원해서’ 험난한 원양어선을 탔던 일이 신기했던지 이 일화부터 자세히 소개했다.

오늘날의 김재철을 있게 한, 그의 삶의 ‘터닝포인트’였음이 분명한 이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김 회장은 부경대 전신 부산수산대를 졸업하던 해(1958년)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출항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 그 원양회사(제동산업)에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여기가 어딘데 풋내기가 오느냐, 최초의 원양어선 출항이라 국내 최고 선원들만 태운다.’는 것이 회사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꼭 타고 싶다고 계속 떼를 썼다. 결국 월급도 받지 않고 죽어도 괜찮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승선할 수 있었다. 선원용 침대도 배당되지 않아 야전침대를 직접 짊어지고 탔다는 대목에서는 코끝이 찡해진다. 

조선일보 기사에서 김 회장은 그 때를 이렇게 돌이켰다. “무엇보다 배 안에서 내 몫의 침대가 없었어요. 나만 접이식 군용 야전 침대에서 잤어요. 파도가 치면 침대와 함께 굴러 터지고 깨졌어요. 그게 가장 서러웠어요.”


△ 지남호에 승선한 김재철 무급항해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우리나라 배가 처음으로 적도를 넘어 태평양에서 잡아온 것이 참치다. 김 회장은 기사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선상에서 참치라는 이름도 지었어요. 본래 다랑어이지만 부르기가 안 좋아 바꾼 거지요. 우리 생선은 치로 끝나니 참으로 좋은 치, 참치로 하자고 했어요.”라며 참치의 내력을 소개했다. 그는 참치를 처음 잡아서 국내에 들여왔던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기자는 “그는 무급의 조업에서 돌아온 뒤 일급항해사로 승진해 다시 출항했다. 1961년에는 27세의 나이로 원양어선의 선장이 됐다”고 소개한 뒤, 김 회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요즘에는 27세 선장은 불가능할 겁니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안주는 것일까요, 젊은이들이 그만한 실력을 안 갖춘 것일까요?”라고.

김 회장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젊은 날 내 수첩에는 ‘인생에 짊어진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이 적혀있었어요. 젊은이들은 찾아서라도 도전하고 시련을 겪어야합니다.”라고.

김 회장의 수첩에 적힌 문장은 이랬다고 한다. ‘인생에 짊어진 짐은 무거울수록 좋다. 그것에 의해 인생이 성장하니까’

무거운 ‘짐’을 찾아다니고, 편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편함을 견디며 인생을 성장시켜온 것이다. 그를 이렇게 달려오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김 회장은 기사에서 “폭풍을 만나 몇 번 사선(死線)을 넘었어요. 남은 인생을 떳떳하게 살아야한다는 마음을 갖게 됐지요. 기업 하면서 위기 때마다 ‘죽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다’는 마음으로 정면 돌파했어요.”라고 말했다. 죽을 각오로 덤볐다는 뜻이다.


△ 1963년 동화 1호의 선장으로 사모아 어장에 출어하기 전 
선원들과 자리를 함께한 김재철 선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기사에서 “내가 100% 정직하게 살아왔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거짓말한 적은 없었다.”고 밝힌 그의 말이 귀에 꽂혔다. 그의 성공 비기의 하나는 바로 ‘정직’이었다.

꾸준한 독서도 그의 삶에서 중요한 덕목인 거 같았다. 그는 기사를 통해 “태평양을 오가는 배 안에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금서(禁書)였던 모택동·레닌·마르크스 등을 일본 서점에서 구입해 읽었으니까요.”라고 밝혔다. 흔들리는 선실에서 외국어로 된 자본론을 읽었다는 것 아닌가? 

이번 조선일보 기사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김 회장이 1954년 부산수산대에 입학하게 된 사연도 유명하다. 고교 은사인 최석진 선생님은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었다. 그 선생님이 어느 날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랬다고 한다.

‘너희들, 서울대가 최고인 줄 아는데 거기 나와 봐야 지금 나처럼 입씨름하며 살기밖에 더하냐? 나 같으면 바다 계통 학교 간다.’

그 때 이 말을 듣고 김 회장은 교무실로 찾아가 바다 계통 학교가 어떤 곳이 있습니까? 하고 선생님께 여쭈었는데 은사님은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가 살길을 바다에 있다.’고만 하셨다한다.

나중에 알아보니 부산수산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제일 좋은 학과가 어로학과라고 해서 입학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는 단어 그대로 ‘맨손’으로 성공신화를 쓴 주인공, 동원그룹과 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자가 됐다.


△ 부산수산대 캠퍼스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김재철 회장(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모두 813쪽에 이르는 김재철 평전은 고난을 보석으로 여기며 미지(未知)에 도전해온 한 인간의 지난 삶을 기록하고 있지만 오늘을 사는 누구라도 거기서 멋진 삶을 위한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  

모두에 밝힌 대로 김 회장은 평전 출간을 사양했지만 우리나라 산업화 초기의 기록을 남기는 데 의의가 있다는 자녀들과 주위 권유를 받아들여 이번 평전을 출판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런 김 회장이 이 두꺼운 평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중에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기사를 정리하면서, ‘어쨌든 우리가 살길은 바다에 있다.’는 은사님의 말씀을 믿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한 그는, 그 은사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우수한 젊은이들이 뜨겁게 도전해 바다를 통해 국부(國富)를 일으켜야한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부경투데이>


△ 부경대 동원장보고관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김재철 회장(왼쪽 일곱번 째). 2010년 2월 개관한 동원장보고관은 김재철 회장이 70억원을 기부해 지어졌다. 건물 앞 표지석에는 ’사랑하는 釜慶大學人들에게 장보고의 開拓精神과 동원의 熱誠, 挑戰, 創造精神을 鼓吹하는 뜻으로 동원장보고관을 세워 드립니다.’ 문구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