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 문양의 2,000년 비밀 풀릴까?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8-10-25 |
| 조회수 | 636 | ||
| 첨부파일 | |||
| 물고기 문양의 2,000년 비밀 풀릴까? | |||||
![]() |
대외협력과 | ![]() |
2018-10-25 | ![]() |
636 |

|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는 “이것은 역사의 작은 에피소드.”라고 말했다.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가 인도에서 온 허황옥.’이라는 기록 말이다. 2,000년 전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이 짧은 기록을 긴 시간 동안 끈질기게 파고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사실을 캐내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보여준 삼국유사의 기록(가락국기‧駕洛國記)을 읽어보자. - 후한(後漢) 건무(建武) 24년(서기 48년 7월 27일) 가락국 해안에 배 한척이 도착하여 20여명의 사람이 상륙한다. 그 사람들 중 한 여인이 가락국 수로왕에게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 이름은 황옥입니다. 나이는 16세입니다.’ 아유타국은 인도 북부 히말라야산맥 아래 있는 아요디아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말도 안 돼! 그 시절 거기서 어떻게 배를 타고 와?’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다. 김 교수는 허황옥의 태생지를 탐사하기 위해 인도 아요디아로 갔다. 왜냐하면 김해시에 있는 허황옥 왕비의 무덤 앞 비석에 그 여인의 시호가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명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허황옥의 태생지 ‘보주(普州)’가 아요디아의 어느 지역의 이름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인도의 아요디아에 보주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쌍어문(雙魚紋)’이 그 지역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사실을 발견한 건 소중한 수확이었다.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고 있는 문양이다. 김 교수는 “아요디아에 있는 수백 개 힌두교 사원의 정문마다 쌍어문이 커다랗게 조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번호판에, 군인과 경찰의 계급장과 단추에도 쌍어문이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이 신어상(神魚像)이라고 불리는 이 문양은 우리나라의 경우 경상남도에만 집중 발견된다. 부산에도 없고 낙동강 서쪽인 가락국 영토에서만 발견되는 문양.”이라고 말했다. 허황옥이 인도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양은 기독교의 십자가나 불교의 ‘卍’자처럼 어떤 사유세계의 상징이다. 어떤 집단의 자기네들만의 사인.”이라고 말했다. 그럼, 허황후 무덤 비석에 씌여진 ‘보주태후(普州太后)’의 ‘보주(普州)’는 어디였을까? 김 교수는 그곳에 인도가 아니라 중국 땅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보주는 현재의 사천성 안악현이 그곳이다. 그래서 그는 허황옥의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후한의 역사서를 뒤졌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가들이 ‘허황옥이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불신하는 이유는 이 여인이 인도에서 처음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까지 항해가 불가능했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그녀가 중간 기착지인 중국의 보주에서 태어나 성장했다면 항해 기록에 대한 의문은 말끔히 사라진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중국의 보주, 즉 안악지방에는 보주 허씨들이 수십 만 명이나 살고 있고 그들도 쌍어문을 경배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쌍어문은 현재 이라크 지역인 과거 바빌로니아, 아씨리아, 그리고 페르시아의 유적지에서도 무수히 발견되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쌍어는 이를 아이콘으로 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신앙 대상이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증거들이 무수히 채집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쌍어문이 한반도 남쪽 김해지방을 거쳐 일본 고대국가인 야마다이코쿠의 중심지인 큐슈의 쿠마모도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서, “즉 중동지방에서 시작된 어떤 사유체계가 서서히 동양으로 흘렀다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런 거대한 쌍어문의 흐름은 우리가 이름을 모르는 어떤 사상의 흐름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아유타국 공주가 가지고 온 선물 보따리에는 비단, 금은 주옥은 물론 미얀마산 루비, 인도산 흑옥, 장신구 등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면서, “이는 쌍어문의 흐름을 타고 상품도 사람도 오고 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벼농사 용어 속에 들어있는 인도어를 소개했다. 쌀 Sal, 벼 Bya, 가래 Kalai, 메뚜기 Metti, 풀 Pul 등 그것이다. 글로벌한 문화교류가 2,000년 전 옛날에도 활발했다는 것이다. 사람과 물건만의 교류만이 아닐 것이다. 피(DNA)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했다. 김 교수는 “쌍어문을 어떤 신앙의 대상으로 하던 사람들의 이동으로 그런 신앙이 서기 1세기 때 한반도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면서, “이는 한반도 고대 주민들에게 불교 이전의 어떤 깊은 사유세계가 뿌리내렸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인도 공주가 가락국 왕비가 되었다’는 역사의 몇 줄을 평생 추적하면서 김 교수는 ‘쌍어문을 상징으로 하는 어떤 사유체계’를 만났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는 한국 사상사 연구에 새로운 불씨가 될 것 같다.”고 했다. <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