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학생이 국제신문 지면을 보고 있다. ⓒ사진 이성재(홍보팀)
부경대학교 사학과‧국제신문 공동기획 <해양문화의 명장면> 38회째 이야기는 이근우 교수(사학과)의 ‘조선 전기 통신사’ 이야기였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전국적으로 내란 상태였던 일본의 무로마찌시대(조선 전기시대)에 조선은 치욕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일본으로 조문사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에도시대에는) 양국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었고, 통신사 일행은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면서, “그러나 무로마찌시대는 상황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무로마찌 막부는 조선과 통교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무로마찌시대에는) 통신사가 교토에 왔을 때 누가 비용을 댈 것인가를 논란하였고, 사신을 돌려보낼 핑계를 대기 위해서 가져온 외교문서에서 잘못을 찾아 트집을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이나 명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막부가 금지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조선은 차라리 대마도나 규슈 북부의 유력자들과 통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면서, “영의정 성석린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일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통신사의 행렬은 이어졌다.”고 밝혔다.
왜 그랬을까?
이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그것은 바로 일본 국왕의 죽음에 대한 조문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조선은 이웃 나라의 왕이 죽으면 반드시 조문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상가는 꼭 찾아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면서, “장군이 죽을 때마다 조문사절을 파견한 조선은 어떤 나라였는가? 예의와 교린의 참뜻을 알고 실천하는 나라는 아니었던가? 이웃의 슬픔을 슬퍼하는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때 바닷길은 아름답게 빛났다.”고 밝혔다.<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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