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부산 산동네를 걸을 때 생각해봤으면 하는 것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1-22 |
| 조회수 | 672 | ||
| 당신이 부산 산동네를 걸을 때 생각해봤으면 하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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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협력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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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 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세 번째 이야기는 ‘부산의 산동네와 재일코리안’이었다. 부경대 HK+사업단 최민경 연구교수는 18일 국제신문 25면에 ‘생계 위해 일본 가려다 좌절한 조선인들, 부산 산동네 둥지 틀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부산의 산동네의 기원’을 조명했다. 최 교수는 이 글에서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 하고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도가 연결되면서 동북아, 그중에서도 (부산은) 한반도와 일본 사이 인구 이동의 중심이 된다.”면서, “일본이 식민지배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대량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선박 취항을 서두르면서 부산을 거친 한반도와 일본 사이 인구 이동은 활발해졌다.”고 소개했다. 그는 “특히 1920년대 들어 많이 증가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농촌의 몰락.”이었다면서, “조선 농토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고 많은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주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조선인 소작농 중에는 농업을 포기하고 노동자가 돼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아 헤매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중 하나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들은 어디를 통해 일본으로 갔을까? 바로 부산이었다. 그런데 그는 “무분별한 알선이 늘자 191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이동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이는 1920년대 이후 계속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규제는) 거주지 경찰서에서 ‘도항증명서’, 즉 현해탄을 건널 수 있다는 증명서를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면서 부산수상경찰서, 오늘날의 부산 영도경찰서에서도 일부 교부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 결과 부산에는 ‘도항증명서’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걸고 조선인 노동자가 몰려들었고 이들의 기대감이 좌절 또는 절정에 달해 표출되는 공간이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조선인 노동자는 ‘희망고문’ 속에 짧게 수일, 길게는 수개월 부산에 머물렀다.”고 밝혔다. 그는 “결국 현해탄을 건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부산에서 오랜 기간 머물던 조선인 노동자는 도시빈민이 된다. 바로 여기 부산 산동네의 시작이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부산 산동네가 여행지로 떠오른 것과 관련 “부산 산동네를 걸을 때, 1920년대 그곳의 ‘움막’에 살면서 부두에 정박돼 있던 부관연락선을 바라봤던 사람들 그리고 재일코리안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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