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식 금지 ‘봉인’ 1,200년 만에 풀리다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2-07 |
| 조회수 | 945 | ||
| 육식 금지 ‘봉인’ 1,200년 만에 풀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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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협력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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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과 국제신문 공동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 다섯 번째 이야기 소재는 ‘스키야키’였다. 이 글은 필자인 공미희 부경대 HK 연구교수는 “전통적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일본 천황 덴무(天武)가 675년 육식 금지령을 제정한 이후 (일본은) 1,200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식문화가 유지됐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1858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로 개항한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과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교류를 했다.”면서, “외국인과의 무역 및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쇠고기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 쇠고기 부족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공 교수는 “이 시기 일본에서는 육우 축산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구미나 중국, 조선에서 소를 수입해 선상에서 해체했다. 결국 1865년 외국인을 위한 쇠고기 가공 처리시설이 요코하마에 설치됐고 1866년에는 고베에서 생산된 쇠고기가 요코하마나 도쿄 등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쇠고기 수요가 증가하자 메이지 시대 초기 도쿄 시바쓰유쓰키쵸(芝露月町)에 최초의 쇠고기 전골집, 1869년 고베 모토마치에 쇠고기 스키야키집 겟카테이가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스키야키는 일본식 쇠고기 전골요리를 말한다. 공 교수는 “메이지 정부는 서구 열강국가와 같은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체력적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육식을 통해 육체적으로 서구인과 같은 체격을 가질 수 있도록 육식문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고 했다. 그는 이에 따라 “부국강병 및 문명개화 정책의 영향으로 메이지 초기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육식문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 현상이 나타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쇠고기를 이용한 일본식 쇠고기 전골(관동지방) 및 스키야키(관서지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소개했다. 공 교수는 “이후 스키야키는 메이지 시대에 서민들에게 육식에 대한 저항감을 줄이는 대표적인 요리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청·일 전쟁 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육식론은 단순한 영양론이 아니고 청·일 러·일 전쟁기에 보여준 내셔널리즘의 한 방편이었다.”고 짚었다. 전쟁을 위한 체격이라니! 이런 사연을 담고 있던 스키야키는 바다 건너 조선에도 전해졌다. 공 교수는 “한국인들이 처음 스키야키를 접한 곳은 조선시대 초량왜관이었다.”면서, “매달 여섯 차례 양국 상인과 무역 관련 관리들이 무역업무를 마치면 일본인들이 스키야키를 끓여 조선인을 접대한 것에서 시작됐으며 조선인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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