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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왜 상하이였을까?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03-05
조회수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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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왜 상하이였을까?
대외협력과 2019-03-05 527



△ 안승웅 연구교수의 글이 실린 국제신문 지면.

상하이임시정부? 3·1운동 후인 1919년 4월13일 수립·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장소는 왜 상하이였을까?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 …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여덟 번째 이야기 소재는 중국 ‘상하이(上海)’였다.

글의 제목은 ‘임정 100주년, 근대 상하이 돌아보다’로, 필자는 안승웅 부경대 HK 연구교수였다.

상하이는 중국 동부 해안의 중간 부분에, 중국을 남북으로 나누는 최대 강인 양쯔강(揚子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해 있고 이 도시의 해안선의 길이는 220㎞이다.

그는 “양쯔강은 수심이 깊고 중국 내륙 깊숙이 연결돼 있어, 춘추전국시대부터 이 일대에는 수로를 이용한 물자 수송이 발달해 있었다.”면서, “상하이는 태생부터 양쯔강 일대의 산물을 한곳에 모아 다른 지역으로 수출할 수 있고, 다른 지역 물건을 수입하여 내륙으로 퍼트릴 수 있는 최적지였다.”고 말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일본의 영향 아래 있었던 동북 삼성을 제외하면, 중일전쟁 전까지 금융 투자의 76.2%, 공업 투자의 67.1%, 부동산의 76.8%가 상하이에 집중돼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안 교수는 “1차 세계대전 뒤 서구 자본은 주기적 경제공황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하이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면서. “상하이 시가지 주변에 공업지역이 형성됐고 상하이는 중국 최초이자 당시 유일의 공업도시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상하이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국제도시로 전변했고, 세계경제공황 시기에 공업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정치적 혼란과 내전 속에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면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제국주의 진출의 상징과 같은 상하이가 역설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의 중심 도시가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말고도 베트남·인도·말레이시아 등과 같은 동남아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가들 또한 상하이에서 활동했다는 것.

그는 “1920~30년대 상하이는 동북아 최대 도시였으며, 북미·일본·중국·동남아·유럽을 왕래하는 윤선(輪船)이라면 모두가 거쳐 가는 세계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영국·미국·프랑스의 조계(租界)가 설치돼 있어 당시 강대국들이 펼치는 정치외교전의 각축장이기도 했다.”면서, “상하이는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국제적 여론을 형성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치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기해년 올해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우리는 100년 전 상하이의 역설의 역사부터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이 역설 속에서 선조들이 상하이를 선택하였던 이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며, 이국만리 타국에서 뜨거웠던 삶을 살았던 선열들을 올곧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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