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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한테 무엇이라도 배우려하는가?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09-10
조회수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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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한테 무엇이라도 배우려하는가?
대외협력과 2019-09-10 454



△ 채영희 교수의 글이 게재된 국제신문 지면.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3회 기사의 키워드는 ‘하멜’이었다.

부경대 채영희 교수(국어국문학과)는 6일 국제신문 17면에 ‘난파당해 온 이방인 … 밀린 급료 받으려 13년 28일 ’조선‘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1653년 8월 제주도 서귀포 인근 해안에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의 13년 동안의 기록인 ‘하멜 표류기’를 들여다보았다.

채 교수는 “‘하멜 표류기’를 읽으면서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조선에서 하멜 일행이 받은 문화충격과 그들이 살기 위해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상상만 해도 힘들었을 것만 같았다.”면서, “‘13년이라는 체류 기간이면 조선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조선어에 대한 기록이 없을까?’ 하는 의문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채 교수는 네덜란드인 가운데 조선말을 익힌 이가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1655년 6월에 청나라 사신이 다시 한양으로 왔을 때 우리 모두는 총사령관의 부름을 받았다. (중략) 우리 중 조선말을 제일 잘 구사하는 사람 세 명이 그곳에 가 좌초된 배가 어떤 배인지 알아 와야 한다고 말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

이어 채 교수는 “하멜 일행이 심한 노역에 옷이 해어져 새 옷을 사기 위해 나무를 해서 팔거나 구걸을 허용해달라고 하는 구절도 보인다.”면서, “지방관이 일주일에 4일 농가나 사찰 등에서 구걸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농민과 승려들에게 그들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금전을 얻어 겨울을 지낼 옷을 구입했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일반인과 소통하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하멜 일행이 남긴 또다른 조선어 기록을 발견한다.

그것은 1705년 니콜라스 휘첸 (Nicolaas Witsen)의 ‘북부와 동부 타타르’(1705) 라는 책에서 하멜과 함께 탈출한 마테우스 에이보켄(탈출 당시 32세)이라는 이발사와 베데딕트 클락(탈출 당시 27세)을 휘첸이 인터뷰해 남긴 기록이다.

채 교수는 “이 책에 당시 네덜란드어와 조선 발음을 적어둔 자료가 있는데 두 선원이 143개 조선어 어휘를 기억에 근거하여 발음하는 것을 휘첸이 기록했다. 이것이 최초로 한국어가 서양에 알려진 기록으로 17세기 조선어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채 교수가 이 기사에 소개한 당시의 조선어 모습을 보자.

- 어제 Oodsey(Overmorgen), 모레 More(Morgen), 물고기 Moelkoikie(alderhande soort van Vis), 뭍고기 Moetkoikie(alderhande soort van Viees), 도깨비 Tootshavi(een Duivel), 각시 Kackxie(een Vrouw), 무명 Boejong( Lynwaet),  비단 Pydaen(Zyde) …

채 교수는 “(이 기록에는) 생필품 이름과 방향·계절·숫자 등에 대한 기본 어휘가 있었다. 특히 ‘머리(대갈)Taigwor, (‘tHooft)’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어떤 계층과 교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하멜 일행이 한양에 왔을 때 구경꾼이 몰려와 길을 다닐 수가 없었다고 했다.”면서 당시 하멜의 기록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매일 많은 고관들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그들과 부인들 그리고 아이들이 매우 신기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채 교수는 지난해 해양수산기록 전공 학생들과 하멜의 흔적을 찾아 네덜란드 헨드릭 하멜 박물관에 갔던 내용을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거기에는 도자기 몇 점과 하멜이 조선에서는 4, 5세 어린아이와 여자도 많이 피운다고 기록한 담배를 피우기 위한 담뱃대, 콩과 마른 명태와 한복을 전시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과 이방인, 서로가 서로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서로 보려고 적극 노력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채 교수는 “하멜 일행이 왔을 때 관측 기술과 선박건조기술, 항해술에 대한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 역사의 큰 변곡점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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