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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이 그 곳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10-22
조회수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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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이 그 곳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대외협력과 2019-10-22 422



△ 최민경 교수의 글이 게재된 국제신문 지면.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8회 시리즈 기사의 키워드는 ‘재일코리안’이었다.

부경대 HK+사업단 최민경 교수는 16일 국제신문 20면에 실린 ‘일(日) 후쿠오카서 만나는 재일코리안의 역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재일코리안의 정착과 고단했던 삶을 이면을 보여준다.

최 교수는 “정말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어디에 사는지는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아가는 곳의 역사, 지리, 문화가 자연스럽게 내 삶에 녹아들기 때문.”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재일코리안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한마디로 재일코리안이라 해도 일본 어느 지역에 사는지에 따라 삶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재일코리안은 일본의 어느 도시를 중심으로 거주하게 됐을까?
 
최 교수는 오사카와 가와사키를 거명한다.

그는 “오사카는 서일본(西日本)의 중심 도시이고, 가와사키는 도쿄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인구 약 150만 명 정도 도시.”라면서, “두 도시 모두 일본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이끈 공업도시로 인건비가 싼 노동자를 많이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오사카와 가와사키에는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커뮤니티를 유지하여 오늘날에 이른다.”고 소개했다.

최 교수는 지역 속 재일코리안을 이해할 때에는 “다양한 지역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주목한 지역은 후쿠오카.

그는 “후쿠오카에 사는 재일코리안은 약 1만2000명으로 오사카(8만4366명) 등과 비교하면 많은 수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후쿠오카는 한반도와 매우 가깝고 근대 이후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항로의 출·도착지와도 인접한다는 사실이 이 지역 재일코리안 역사, 나아가 오늘날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연락선이 취항하면서 후쿠오카에 유입하는 조선인은 크게 늘었다. 시모노세키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도시로 이동했는데 그중 한 곳이 후쿠오카였다.”고 밝혔다.

후쿠오카에서 조선인은 무슨 일은 했을까?

최 교수에 따르면, 대표적인 일이 광부였다고 한다.

최 교수는 “후쿠오카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산업화에 필수불가결했던 석탄의 주요 산지였다. 많은 노동자, 광부를 필요로 했으며, 조선인이 유입되었다.”면서, “이들의 임금은 일본인 광부보다 적은 것은 물론,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공장 노동자 조선인보다도 적어 전체 재일코리안 중에서도 상당히 궁핍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재일코리안의 거취는 어떻게 됐을까?

최 교수는 “패전의 혼란 속에서 재일코리안의 한반도 귀환은 순조롭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고자 많은 재일코리안이 하카타항 근처로 몰려들었지만 정작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그 결과 1945년 12월이 되면 2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하카타항 근처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이들은 판잣집에서 돼지를 키우거나 밀주를 만들어 암시장에 팔아 생활을 유지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렇게 귀환을 ‘미루는’ 과정에서 판잣집 임시 거처는 정착지가 되어 갔다.”면서, “1959년 후쿠오카현과 시가 국가 보조를 받고 스스로도 비용을 분담해 인근 지역에 공동주택인 ‘단지’를 세우고 재일한인을 이주시키는 것으로 결정, 1962년 실행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 시점에 오늘날로 이어지는 후쿠오카 재일코리안 커뮤니티의 원형이 만들어진다. 해방 이후 후쿠오카 재일코리안 커뮤니티는 한반도 귀환과 일본 체류가 교차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자생적 집주 지역이 이후 도시문제가 되면서 행정에 의해 ‘단지’라는 특수한 공간에 밀도 높게 ‘만들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재일코리안의 삶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 다양한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여러 가지 빛깔을 보이는 재일코리안의 역사와 오늘에 대한 퍼즐을 하나씩 맞춰볼 필요가 있겠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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