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전으로 본 동북아 100년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11-27 |
| 조회수 | 415 | ||
| 해전으로 본 동북아 10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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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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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43회 시리즈 기사의 키워드는 ‘해전’이었다. 부경대 김윤미 교수(HK+사업단)는 20일 국제신문 21면에 실린 ‘땅 차지하려 100년 간 바다전쟁 … 이젠 섬 뺏으려는 힘겨루기로’라는 제목의 글에서 ‘동북아 100년 해전’을 일별해 주었다 김 교수는 “19세기 말부터 서구 열강과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을 위해 전력을 다해 해군력 건설에 착수했다. 해군력은 식민지와 세력권 확대 그리고 본국과 식민지 사이 해상교통로 확보를 위한 힘의 표상이었다. 동북아에서도 각국 해군력 확장이 시작되면서 동북아를 재편하려는 강국들의 충돌이 발생했다.”면서, “지금 시점에 다시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그때 그 관계망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라고 글을 시작했다. 그는 “중국 해군력과 일본 해군력이 황해에서 충돌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고, 동북아는 새로운 질서를 형성했다.”고 말하고,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지면서 아시아 패권국 지위를 잃었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지면서 동북아의 영향력마저 상실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조선은 1893년 영국 지원을 받아 최초 해군사관학교라 할 수 있는 조선수사해방학당을 강화도에 설립하고 해군 양성을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양무호의 실패를 경험하고 두 번째로 조선이 산 군함은 일본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에서 건조한 광제호였다. 1904년 12월 인천항에 도착한 광제호는 등대순시, 해안 경비, 세관 감시 등 다목적으로 쓰였다.”고 말했다. 그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예산을 쏟아 부어 군함 건조를 시작했다.”면서,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해군력을 키웠다고 판단한 일본은 1904년 부산에 정박했던 러시아 상선을 포박하고, 중국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이 소식을 듣고 유럽에서 출발한 러시아 발틱함대를 일본 해군은 대한해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을 이겼고,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는 해군력을 상실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에 일본 군사력을 배치하려 했고, 만주까지 확보하고자 했다. 이러한 야욕의 배경에는 해상제국 영국이 있었다. 동북아 패권을 러시아가 독차지할 것을 우려한 일본·영국 공조였다. 두 나라는 2차례 영일동맹을 맺었고, 영국의 막대한 지원을 일본이 받았다.”고 썼다. 그는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1905년 7월 미·일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일본은 조선 점령을 서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동북아는 또 다른 국제질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면서, “ 1950년 세계 각국의 배들이 한국 부산항으로 향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에서 6월 26일 유엔군 창설을 논의했고, 28일 파견을 결의했다. 16개국은 전투에 참전했고, 50여 개국은 의료와 물자를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모든 수송은 바다로 이뤄졌고, 대부분 부산항으로 상륙했다.”면서, “이 전쟁은 한반도가 분단되는 것으로 끝이 났고, 동북아 바다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아픔을 기억해야 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제는 육지 쟁탈이 아닌 해역과 섬을 차지하려는 해양영토 분쟁의 서막이 올랐다. 바다 위 섬을 차지하기 위해, 해역의 한 지역을 영토화하기 위한 해군력이 충돌하고 있다.”면서, “다시금 동북아 국가는 물론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나라가 해군력 증강을 통해 제해권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