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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이동진 대위 추모비. ⓒ이성재 사진(홍보팀)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 학군단 화단에 까맣고, 키가 낮은 빗돌 하나가 있다.
그 비문을 읽어보자.
“살신성인 실현한 이동진 대위
여기 붙박이 별로 자리 했나니
고귀한 그 넋 길이 빛나리.”
- 1988년 9월 3일 육군 ROTC동창회 세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8년 육군 승리부대 GP 지뢰 매설 중 부하 병사를 구하고 장렬하게 순직’이라는 짤막한 기사가 빗돌 뒤에 적혀있다.
고(故) 강재구 소령을 아시지 않는가. 1965년 10월 4일 중대원 실수로 떨어뜨린 폭발직전의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쳐 1백여 명의 부하들을 구하고 자신은 산화한!
고(故) 이동진 대위도 그랬다. 강원도 최전방 부대 철책 안에서 지뢰매설 작업을 하다, 폭발하는 지뢰를 자신의 몸으로 막고 부하 14명을 구하고 순직한 중대장이었다.
그런 그는 부경대학교 전신 부산수산대학교 수산경영학과 82학번으로 육군 ROTC 24기 소위로 임관한 자랑스러운 부경인이었다.
그 때가 1988년 5월 4일이었으니 벌써 25년 전의 이야기다.
그 때 그는 15사단 38연대 중위였다. 지뢰매설 작업 도중 급작스럽게 돌풍이 불어 예기치 않은 지뢰 폭발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폭발 직전 그는 자신의 몸을 서슴없이 던졌다고 한다. 함께 작업하던 대대장 강병식 대령도 순직했다.
1964년생인 그가 살았으면 올해 50세이니 공교롭게도 그에게 올해는 삶의 시간과 죽음의 시간이 같아진 해다. 이제 그에게 죽음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기 전에 그의 짧은 삶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다.

△ 고(故) 이동진 대위의 졸업 당시 사진. |
고 이동진 대위의 고향은 경남 의창군 대산면 제동리. 농업을 하는 부모님 아래 4남 1녀 중 3남이었던 그는 온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경남 대산고등학교를 졸업,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부산수산대 수산경영학과에 입학, 우리나라 수산행정 리더의 꿈을 키웠다.
학군 24기로 임관해 전투병과 학교에서 소대장 교육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한 그는 1986년 6월 육군 승리부대 전초대대 1중대 3소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부하의 잘못을 고치려고 그 부하와 함께 군장을 꾸려 구보를 하면서 내면으로 소통했던 가슴 따뜻한 소대장이기도 했다. 그가 이끈 소대는 무사고 소대로서 1987년 부대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88년 5월 4일 별안간 우리를 떠났다.
그의 친구 최석관 동문(국립수산과학원 자원관리과·해양공학과 82학번)은 25년 전의 일을 방금 일어난 일을 전하는 사람처럼 전율했다. 부경대 육군 ROTC 24기로 이동진 대위와 동기인 최 동문은 서로 떨어져 근무했지만 같이 전방부대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제대 2개월을 앞두고…그해 6월 30일이 제대 예정일이었다.” 자신만 무사히 제대하고 온 것이 못내 미안한 듯, 전화기 너머 가늘게 떨리는 최 동문의 목소리가 이쪽으로 흘러왔다.
그는 “그 친구는 언제나 활달하고 성격도 좋았다. 축구를 비롯해서 운동도 잘 하는 멋진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이동진 대위가 근무하던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는 그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3미터 높이의 추모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 조국과 겨레를 위해 의롭고 고귀하게 살아 장렬히 산화한 강병식 대령과 이동진 대위의 넋이 살아 숨 쉬는 곳. 부하를 위한 솔선수범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그대들의 부하사랑 정신은 승리부대 장병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리.”

△ 동아일보 1988년 5월 13일 기사. 왼쪽 사진이 고(故) 이동진 대위. |
1988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의 「부하 구하고 산화 두 장교 훈장 추서」라는 기사를 보자. - ‘정부는 5월 13일 중부전선 최전방에서 지난 4일 지뢰매설작업을 앞장서서 하다가 사고로 지뢰가 터지자 고함을 쳐 부하장병 14명을 구하고 숨진 강병식 대령과 이동진 대위에게 보국훈장 삼일장과 광복장을 각각 추서했다.’
이동진 대위의 고향에서는 동상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상이군경회 창원시지회 박성진 회장은 “창원시 삼동동에 있는 충혼탑에 고 이동진 대위의 동상 자리를 마련해두었다.”면서, “창원시와 동상 규모 등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부경대 육군학군단 동창회는 해마다 현충일에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그 해 5월 4일 지천으로 피어난 진달래처럼 산화한 그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목 아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누르면서.
너무나 젊은 시절에 떠났으므로 그에게 긴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그의 짧은 삶에는 깊은 떨림이 있다. 그는 그 긴 울림으로 우리 부경인들,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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