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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4-10-16
조회수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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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대외협력과 2014-10-16 1586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16일 오전 7시 부경대학교 미래관 4층 컨벤션 홀에서 부‧울‧경 지역 CEO를 대상으로 열린 <부경CEO 행복 인문학 콘서트> 9강의 주제였다.  


△ 인문학 콘서트 전경. ⓒ이성재 사진(홍보팀)

강사로 나선 김상근 교수(연세대 신과대학)의 이날 주요 메뉴는 ‘메디치 가문’이었다. 김 교수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했던 메디치라는 독특한 가문이 있었기에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메디치는 어떤 가문인가? 평범한 시골 농장주에서 은행업으로 부와 권력을 쌓은 메디치가문은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가문. 장장 346년간(1397∼1743년) 세계 최고의 부(富)를 축적한 유럽 최고의 귀족 가문으로 300여 년 간 피렌체를 통치했다.

그 사이 메디치 가문은 로마 교황을 두 사람(레오 10세, 클레멘트 7세), 프랑스 왕비를 두 사람(카테리나 데 메디치, 마리아 데 메디치)이나 배출했다. 이 가문에서 오페라와 식사예절, 그리고 여성바지, 하이힐이 탄생했을 정도였다.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 예술과 과학 등의 분야의 위대한 천재들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빛났다.

김 교수는 “길거리에서 조각하던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입양해 당대 최고의 천재를 동원해 철학을 가르친 것이 메디치 가문이었다.”고 말했다. 메디치 은행의 직원이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메디치 가문의 지시로 신대륙탐험에 나섰다고 한다.

중세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열었던 메디치가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김 교수는 “그 힘은 돈과 권력이 아니었다.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 이 손가락을 보라!

김 교수는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메디치 가문의 ‘신의’를 상징한다.”면서, 지금은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 세례 요한’ 작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 요한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위를 향하고 있다. ‘이 분이 메시아!’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손바닥의 방향이 안쪽, 그러니까 자신을 향하고 있다. 특정 사람을 가리킬 때의 모양이 아니다. 왜 그럴까?
  
먼저 교향 요한 23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 교수에 따르면, 그는 원래 발다사레 코사라는 이름의 나폴리 출신의 해적이었다. 1378년부터 1417년 사이, 유럽 사회는 가톨릭교회 대분열 시기였다. 그는 박사학위와 추기경을 매입, 1410년 교황 요한 23세로 취임한다. 그런데 그는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이었다.

그런 그는 마르틴 5세가 정식 교황으로 취임하면서 강제로 퇴위되고, 35,000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벌금형 선고받고 투옥된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은 메디치 은행의 첫 고객인 요한 23세에게 피렌체에서 망명할 수 있도록 저택과 생활비를 지원했다. 더욱이 1419년 요한 23세가 사망하자 성 세례 요한 세례당 안에 교황 영묘 제작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요한 23세는 임종 직전, 자신이 권좌에 있을 때나 권력을 잃었을 때나 변함없이 보살펴준 메디치 가문에게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기증했다.

그런 일이 있은 5년 이후 교황이 주거래은행을 메디치은행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메디치은행은 전 유럽에서 최고의 은행으로 발전했다. 

그 후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교황 레오 10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성 세례요한’ 제작을 의뢰한다. 그림 속 요한의 손가락 방향까지 알려주면서.

그림 속의 이 손가락은 웅변한다. ‘우리 메디치 가문의 시작을 보라. 메디치 가문은 한번 맺은 신의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2. 정면 돌파의 모범을 보여라!

1478년 나폴리 국왕 페란테가 사주한 로렌초 데 메디치 암살 시도 사건이 발생한다. 부활절 미사를 틈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자객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로렌초는 목숨을 구하고 대신 동생 줄리아노가 현자에서 즉사하는 불운이 닥친다. 그러나 이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끝까지 로렌초를 잡기 위해 1479년 페란테가 나폴리-교황군 연합군을 출정시켜 피렌체를 포위하는 상황으로 비화된다.

이 위기 상황에서 로렌초는 피렌체를 빠져나왔다. 도망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적진 나폴리로 가기 위한 것. 나폴리로 가기 전에 그는 원로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원로 여러분. 위기와 절망에 처한 피렌체를 구하기 위해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 우리 피렌체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다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지금, 피렌체가 더 큰 재난에 봉착하기 전에 제 목숨을 걸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폴리로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들끓는 그 곳으로 제가 가겠습니다. 우리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면 적의 손에 저를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폴리 국왕이 우리 도시에서 자유를 뺏어갈 계획이라면, 피렌체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재앙이 닥치기 전에 제가 먼저 그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겠습니다. 저 혼자서 그 희생을 먼저 감당하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뿐입니다.’

그리고 로렌체는 용감하게 적진에 들어가 나폴리 국왕 페란테와 독대했다. 운도 좋았다. 때마침 이탈리아 동쪽 끝으로 무슬림이 쳐들어왔다. 둘이는 힘을 합쳐 이들을 물리치기로 의기투합하면서 갈등은 해소됐다.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김 교수는 “위기의 순간에는 정면 돌파해야한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현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3.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라!

위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김 교수는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야한다는 것을 메디치 가문의 딸 카테리나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 김 교수는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인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언제나 기억했던 메디치 가문의 진정한 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을 받아 1533년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한다. 그러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몰락과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서거로 돈과 배경을 모두 잃게 된 그녀는 비극적인 결혼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카테리나와 결혼한 왕세자 앙리 2세는 미모의 애첩인 디안과 생활했고 그녀는 무시당했다. 하녀들에게도 왕비가 아니라 ‘그 이탈리아 여자’로 불렸을 정도였다. 앙리 2세가 국왕으로 취임하면서 새 왕실의 문장이 앙리와 디안을 상징하는 HD((Henri-Diane)로 서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앙리 2세가 마상 창 시합 중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카테리나 데 메디치 왕비는 드디어 왕실과 프랑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김 교수는 “온갖 수모에도 참고 또 참으면서 때를 기다렸던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참된 제자였다.”고 말했다.

카테리나는 실권을 장학하고도 자신의 연적이었던 디안을 사랑과 관용으로 용서했다. 김 교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고 말했다.

그 후 그녀는 아들 3명을 차례로 프랑스의 왕으로 등극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실과 사돈을 맺었을 정도로 16세기 유럽을 쥐락펴락했던 프랑스의 검은 왕비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부경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