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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2강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5-10-22
조회수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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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2강
대외협력과 2015-10-22 1511

고미숙 고전평론가(감이당 연구원)가 10월 22일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 18세기 조선지성사의 라이벌 연암과 다산’을 주제로 부산 경남 울산 지역 CEO 100여명에게 특강을 했다.


△ 고미숙 고전평론가. ⓒ사진 이성재(홍보팀)
이날 오전 7시 부경대 미래관 소민홀에서 열린 ‘부경 CEO 행복 인문학 콘서트’ 제11강 강사로 나온 그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삶과 철학을 비교해 들려주면서 이날 모인 CEO들에게 ‘나는 과연 연암 쪽인가, 다산 쪽인가?’를 물어보게 했다.

그는 “연암과 다산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역이자 조선 최고의 문장가들이지만 철학과 세계관은 극과 극.”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연암과 다산은 우리 시대의 빛나는 두 개의 별.”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연암과 다산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말을 따라가 보자.

연암은 당시의 집권 당파였던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권력의 장을 벗어난 터라 당쟁과 유배 같은 정치적 스캔들은 겪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글을 관통하는 건 우정과 유머 혹은 패러독스(역설)다. 20대는 유람과 방황으로 다 보냈고, 30대는 ‘백탑청연’이라는 네트워크에서 지성과 문장을 연마했다.

44세가 되던 해 마침내 꿈에 그리던 중국여행을 다녀왔고, 그 여행의 기록이 세계 최고의 여행기「열하일기」다. 요컨대 그는 권력의 외부에서 늘 삶의 새로운 경계를 열어젖힌 노마드(유목민)였다.

다산은 그 반대다. 재야에서 떠돌던 남인 출신이다.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20대에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 이후 정조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연루되었던 그의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그는 장기와 강진에서 장장 18년에 걸친 유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정조도 없고 가문도 몰락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대학자로 거듭났다. 선진 경학의 이치를 다 꿰뚫고 그것의 현실적 적용서인 목민심서를 완성했다.

이날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몸의 리듬과 강밀도를 만들면 인생이 다르게 펼쳐진다는 점을 이 두 사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면서, “뚱뚱한 외모인 연암은 물의 체질, 마른 체형인 다산은 불의 체질”이라고 말했다.

인간관계, 그대는 연암 쪽인가, 다산 쪽인가?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인간관계 스타일도 두 사람이 판이하게 달랐다.”면서, “연암은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스타일이었다. 우정이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암의 아들이 쓴 아버지 박지원 평전을 보면, ‘아버지는 혼자 밥을 드신 적이 없다.’고 적혀있을 만큼 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다.

이 평전에는 이런 일화도 있다고 한다. 연암이 뒤늦게 미관말직을 얻어 떠돌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죽은 친구들이 꿈에 나타나 ‘관직에 올랐으니 술 한 잔 사라’고 했기 때문에 죽은 친구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신 것이라 한다. 연암이 죽기 전에는 아파 술을 먹지 못하자 옆에 친구들을 불러 수다를 떨게 하고 자신은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연암의 친구는 열하일기를 있게 한 저력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누구라도 연암의 친구가 되었다. 연암은 명문가 출신이지만 수평적 윤리가 몸에 배인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다산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는 “다산은 자신이 스스로 천주교가 아니라고 밝혔기 때문에 3년이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그를 풀어주려면 친구들이 말렸다.”고 말했다. 바로 그 친구들이 성호우파들이다. 실학의 태두인 성호이익의 제자들은 분파된다. 선생이 말한 대로 실천하는 우파와 선생이 말한 것을 변화시켜 실천하는 좌파. 다산은 성호좌파였다. 그래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대의 글쓰기는 연암 쪽인가, 다산 쪽인가?

고미숙 고전평론가에 따르면, 연암은 문체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문체가 그를 최고의 지적 문장가로 만들었다. 연암은 몸으로 움직이면서, 중원천지를 다니면서 글을 썼다.

자신을 비우고 가면서 아이나 노파나 기계 등 무엇을 만나도 자기를 변형해낼 줄 알았다. 그에게는 시작과 끝 모두 정해진 것이 없었다. 프레임이 없었던 것이다. 연암은 노마드였다. 그래서 그에게서 지금까지 없던 사유, 없던 문체가 나왔다.

그는 “연암은 몸이 무겁지 않다. 비장하고 엄숙하면 금방 쓰러진다. 연암은 경쾌 유쾌 명랑했기 때문에, 물처럼 흐른 스타일이었다. 몸이 자유롭기에 보는 것마다 새로운 감흥이 일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암은 표현양식의 변화에 주력했다. 거기에는 해학과 풍자,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전략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암이 보기에는 당대의 지배적 문체인 고문(古文)은 생동하는 흐름을 질식시키는 억압기제가 되어버렸다. 연암은 삼라만상에 흘러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고문의 전범적 지위는 와해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러한 욕망이 문체의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극히 다양하다. 열하일기가 보여주듯 그는 고문과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들을 종횡했다.”고 했다.

연암은 고도로 응축된 문장으로 18세기 문체혁명을 주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배경이다. 정조가 지식인의 글을 정치적 이슈로 연출한 것이다. 정조는 당시 큰 인기를 끌던 연암의 「열하일기」같은 참신한 문장을 잡문체라 규정한다. 그리하여 정통적 고문(古文)으로 회복시키는 여러 사업을 추진한 것.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다산은 문체적 실험에 격렬히 반대했다.”면서, “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문체를 어지럽히는 것이라고 거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산의 대표작 「목민심서」는 앉아서 쓴 책.”이라면서, “다산은 유배지에 가자마자 책 보고 글을 쓰는 공부를 시작했다. 지식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원 없이 공부하는 것, 주역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고 고대경전 번역 작업을 하는 등 온 우주의 지식을 전부 정리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산은 거대한 이상과 비전을 새롭게 구축하고자 했다. 시는 도덕적 자기완성의 내면적 경지가 아니라 외부로 뻗어나가 실제적 성취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의 맥락에서는 실천해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유배지에서 꽃핀 다산학을 관통하는 치열한 현실주의자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문으로 된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질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연암이라면, 다산은 한문이 유입된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겨 최고의 박람강기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자식 교육, 그대는 연암 쪽인가, 다산 쪽인가?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다산은 편지에서 아들에게 공부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충고한다. 이제 폐족이 되었으니 우리에게 남은 일은 공부밖에 없다고 하면서 아들들의 학습 진도를 수시로 확인한다. 너희들이 공부를 해야 내 삶이 소명된다고 하면서. 술이 주는 온갖 극단적 폐해를 동원해 아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한 다산의 충고는 가히 절정이다.

그는 “자식에 대한 다산의 편지는 순수하고 감동적이지만 결국 자식에게 부담을 주게 되고 아버지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연암은 과거시험을 거부했던 인물이다. 과거장에 억지로 끌려가서도 답안지에 이름을 안 쓴다거나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과거시험을 회피했다.

그는 “연암은 아들에게 과거에 연연하는 쩨쩨한 선비가 되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백수였던 연암은 소고기 고추장볶음 요리까지 해서 아들에게 보내주면서 맛이 어떤지를 물었다고 한다.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 보고 싶어 주변의 소리가 온통 손주 울음소리로 들렸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한다. 그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묘사해 보내달라고 아들에게 편지할 정도로 정이 넘쳤다.

그는 “연암의 아들이 쓴 아버지 평전에는 아버지에 존경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면서, “연암의 자식사랑은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촉발되고 감염되는 종류의 것.”이라고 말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에 따르면 물의 성격인 연암은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스타일, 물처럼 흘러가는 삶을 살았다. 그전에는 북벌로 자신을 닫고 있었던 조선이 18세기 세계 문명 중심지로 떠오른 청나라, 즉 북쪽에서 배우자는 북학그룹의 새로운 흐름이 연암그룹이었다.

불의 체질인 다산의 경우는 어둠, 부조리, 남의 잘못 다 밝혀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며 자기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체질이다. 정조가 죽지 않아 유배되지 않았다면 과로사 했을 수도 있는 스타일. 유배가 바로 다산에게는 안식년이었다. 다산은 청나라에는 관심 없었고, 중국 고대사, 고대 경전 연구에 심혈 기울였다. 이런 성격도 천주교와 연결된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고미숙 고전평론가는 분석했다.

그는 “20세기가 다산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연암이 새로운 지도가 되어야한다. 연암의 글을 읽고 지혜를 얻는 시대가 되어야한다. 연암이 빛날 때 다산이 그 뒤에서 비추는 시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부경투데이>


△ 행사 후 단체 기념촬영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