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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 | 하순섭 회장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6-03-31
조회수 1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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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 | 하순섭 회장
대외협력과 2016-03-31 1672



△ 부경투데이와 인터뷰하고 있는 하순섭 동문. ⓒ사진 이성재(홍보팀)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각, 서면 영광도서 앞에는 그가 없었다. 두리번거리는데 서점 안에서 그가 불쑥 나왔다. 한손에는 두툼한 책 한권이 들려 있었다. 다름 아닌 「김재철 평전」이었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서점에 들어가 최근 발간된 「김재철 평전」을 산 그 사람, 그는 부경대학교 동문 하순섭 회장(74세)이었다. 팔라우에서 활동하는 사업가로 ‘한파그룹’ 회장이다.

평전의 주인공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그와 같은 부경대 전신 부산수산대 어로학과 선배다. 김 회장이 54학번, 하 회장이 62학번이니까 그가 8년 후배다. 그는 찻집까지 걸으면서 “이 분은 그때 우리의 우상이셨지.”라고 말했다.

「김재철 평전」 이야기는 이 ‘부경투데이’를 통해 앞서 소개한 바 있다. 그 책이 막 전국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던 3월초, 팔라우의 하순섭 회장이 한국에 잠깐 귀국했던 것이다. 젊은 날의 우상이었던 이의 평전을 접한 그의 소회는 남달랐을 듯하다.

하 회장은 ‘세계 속의 한국인, 팔라우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mbc에 방송된 인물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나라 팔라우공화국에서 호텔, 무역, 쇼핑센터, 식당, 부동산 등 무려 15개 분야 사업을 하며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찻집에 앉자마자 그는 긴 이야기의 터널 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야기의 라인은 김 회장 → 하 회장 → 후배에게로 이어졌다. 어떤 없던 길을 내며 그 길을 헤쳐 지나간 사람은, 아직 길을 가지 않은 이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고, 또 주게 될까?

‘김재철 회장을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하 회장은 준비된 말처럼 바로 말했다. “선배님에게서 감화를 받고 그 힘으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김재철 선배님처럼 되겠다.’ 이것이 하 회장 대학시절에 하 회장 같은 부경대 학생들의 꿈이었다고 한다.

하 회장은 대학 졸업 후 해병 중위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원양선사에 입사 1등 항해사와 선장으로 태평양과 인도양 대서양을 누볐다. 가다랑어 채낚이에서 높은 어획량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75년 가다랑어의 황금어장인 팔라우에 수산 회사를 차리게 되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보아야했다.

그는 “그 때 가지고 간 선박 크기가 팔라우 연안에 활약하기에 너무 컸고, 고기의 먹이인 플랑크톤을 몰고 다니는 조류가 바다에서 사라지는 6개월간은 조업할 수 없다는 현지사정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그 당시 밀린 임금 때문에 성난 선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 밧줄에 묶여 팔라우 바다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돌이켰다.

그 이후 그가 다시 팔라우에서 재기해 오늘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은 학창시절 열심히 갈고 닦아 두었던 영어가 무기였다.”고 말했다.

’쫄딱 망한 채’ 팔라우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수산자원개발공사에 입사한다. 후배 아래 말단 직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영어실력 덕분에 그는 사모아주재원으로 파견된다. 이어 1979년에는 미국 통조림회사(International van camp seafood company)에 스카우트되어 선박선원 총책임자로 가나에 파견됐다가 팔라우로 발령 났다. 

1982년, 팔라우에서 그는 오늘의 한파그룹의 출발점이 된, 불고기를 주 메뉴로 한 한식당 아리랑레스토랑을 열게 된다.    

그는 “영어를 알았기 때문에 팔라우에서 사업을 할 수 있었고, 팔라우 정부와 관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 회장은 “그 때 대학시절 분위기는 다들 그렇게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다.”면서, “그런데 생각해보니, 대학을 졸업해서 배를 타면 나중에 선장이 되고 선장은 민간외교관인데 외국에 나가면 말이 통해야 죽인다는 건지 살린다는 건지 알 것 아닌가 싶어서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그의 외국어 공부에 더욱 채찍질을 한 이는 김재철 회장이었다. 

그 당시 그의 가슴에는 항상 김재철 회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김재철 회장은 ‘참치를 최고로 잘 잡는 선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항상 김재철 회장을 닮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 회장이 ‘성공하려며 뼈를 묻을 각오로 하라’는 말을 어디선가 했는데 그 말이 특히 가슴에 남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업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인생은 두 번 오는 것이 아니다. 죽으면 썩어질 살, 할 때까지 해보자는 각오로 노력했다.”고도 말했다.

롤 모델을 닮으려는 갈망, 내일을 위한 철저한 준비, 죽기살기식의 투지가 그를 오늘의 성공의 자리로 데려다준 것이었다.

후배들에게 하고픈 그의 당부는 ‘남다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영어만 가지고 안 된다. 제2, 제3의 외국어를 준비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개발된 곳에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여기보다 기회가 거기에 더 있다.”고도 했다.<부경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