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귤을 까면서 당신이 생각했으면 하는 것들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2-26 |
| 조회수 | 372 | ||
| 감귤을 까면서 당신이 생각했으면 하는 것들 | |||||
![]() |
대외협력과 | ![]() |
2019-02-26 | ![]() |
372 |

|
감귤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 글의 필자인 부경대 HK+ 최민경 연구교수는 “감귤 재배 확대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주도 방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제주도의 경우 여건이 특수하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반적인 농업 목표, 즉, 식량 증산은 염두에 두지 말고 수익성이 높은 감귤 재배에 힘쓸 것을 당부한다.”고 소개했다. 그는 “(그러나) 감귤 재배를 확대하고 싶어도 감귤 묘목이 없었다. 여기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 사는 제주인, 재일제주인이었다.”고 밝혔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 살던 제주도 사람들이 감귤 묘목을 고향 제주에 기증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5년. 최 교수는 “너무 많은 기증으로 인해 1979년 제한이 이뤄질 때까지 300만 그루 이상이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심어졌다. 이는 제주도의 색깔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제주사람들은 왜 일본에 살게 됐을까?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진 조선인은 1920년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많아졌다.”면서, “일본에 간 제주인이 가장 많이 자리 잡은 곳은 바로 기선이 도착한 오사카였다.”고 밝혔다. 이들은 오사카의 봉제공장, 재봉틀공장, 신발공장 등에서 값싼 임금을 받으며 일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일본의 제주인은 ‘조선인’이자 ‘섬사람’으로서 이중적인 차별을 겪게 된다. ‘일본인’에게서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육지 사람’ 조선인으로부터는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멸시받았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을 것이다. 최 교수는 “(일본에 있던 제주 사람들의) 고향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바다를 건넌 감귤 묘목으로 나타났다.”면서, “1961년 일본에서는 ‘재일본 제주개발협회’가 만들어졌다. 이름에 포함된 ‘개발’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단체는 ‘육지’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제주도의 발전을 위해 재일제주인 유지들이 모여 만들었고 그 원동력은 ‘제주인’으로서 자부심과 애향심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재일제주인은 상대적으로 감귤 재배가 선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던 일본에 살면서 그 맛과 수익의 ‘달콤함’을 알았다.”면서, “게다가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라는 감귤은 제주도의 온화한 기후에 안성맞춤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감귤 묘목을 기증하는 것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의미도 있었다.”면서, “고향의 삶이 나아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수입을 보장하는 산업, 그중에서도 농업 전반을 이끌어 갈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감귤 묘목을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