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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간 우리에게 육신을 준 물고기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9-09-02
조회수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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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간 우리에게 육신을 준 물고기
대외협력과 2019-09-02 538



△ 김문기 교수의 글이 게재된 국제신문 지면.

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2회 기사의 키워드는 ‘명태와 정어리’였다.

부경대 김문기 교수(사학과)는 8월 30일 국제신문 21면에 ‘초량에 세워진 부산 첫 물류창고…함경도 명태·정어리로 가득 차’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우리의 바다를 종횡무진 헤엄쳐다니며 지난 300년 동안 이 땅 사람들에게 육신을 제공한 명태와 정어리, 그 부침의 역사를 소개했다. 

김 교수는 부산역 맞은편 옛 백제병원 근처에 남아있는 ‘붉은 벽’을 통해 명태와 정어리의 부침사로 들어간다. 이 붉은 벽은 남선창고의 흔적이다.

그는 “남선창고는 1900년 부산 객주 정치국의 주도로 설립된 부산 최초 근대식 물류창고였다.”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정치국은 협동기선회사를 만들어 부산을 기점으로, 각각 함북 경성(鏡城)과 인천을 잇는 항로를 개척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함경도에서 수송하는 수산물을 저장할 창고가 필요하게 됐는데, 그 창고가 1910년대 ‘북어창고(北魚倉庫)’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김 교수는 “이는 남선창고에 보관했던 가장 중요한 물류가 명태였음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는 “효종 3년(1652) ‘명태(明太)’라는 이름을 처음 드러냈던 이 물고기는 18세기부터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물고기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명태는 산지가 명천, 성진, 신포 등이었기에 이곳과 가까운 함흥이 집산지가 되어 부산으로 운송됐다가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부산이 중앙 집산지로 명태 유통 중심지가 된 것이다. 1905년 경부선 개통은 부산의 이런 지위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의 이런 위상은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흔들렸다. 원산과 서울이 철도로 연결되면서 굳이 부산을 경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원산이 다시 명태의 중앙집산지가 되면서, 1917년 원산에 지점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얼마지 않아 원산지점이 본점이 되고, 부산본점이 지점이 됐다. 1920년 회사 이름도 ‘북선창고(北鮮倉庫)’로 바꿨다.”고 밝혔다.

이 북선창고는 1926년 ‘남선창고(南鮮倉庫)’로 이름이 바뀐다.

김 교수는 “‘북선’은 러일전쟁 이후 만주와 연결되는 한반도 동북부의 전략·경제적 중요성이 제기되면서, 1910년대에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등장했다.”면서, “만주와 연결되는 최단 루트라는 점에서, 1930년대 후반에는 북선 3항이 요동반도의 대련보다 더 중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부터 ‘북선’에 정어리 떼가 몰려들었다. 당시 물고기 기름을 이용한 경화유 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무수히 몰려드는 정어리가 각광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때부터 명태는 홀연히 격감하여 불어가 계속되었다. 절대적인 수요를 가진 명태의 부족을 어떻게 메웠을까? 놀랍게도 홋카이도에서 명태를 들여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7세기 후반에만 하더라도 일본은 명태를 맛도 없는 하품으로 여겼다고 한다.

김 교수는 “홋카이도에서는 1903년과 1904년에 명태어군이 발견되면서 점차 전업으로 발전해 갔다.”면서, “(당시) 일본인은 명태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이 거의 유일한 판로였다. 일본 어민들은 조선에서 기술자를 초빙해 명태건조법을 전수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때부터 일본에서도 명태는 청어와 정어리를 제치고, 일본 제일 어업으로 발전했다. 명태어업 급성장 이면에는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명란이라는 근대 ‘맛의 교환’이 있었음은 기억해 둘 일.”이라고 밝혔다.<부경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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