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 도쿄가 지식네트워크 중심이 된 이유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12-26 |
| 조회수 | 334 | ||
| 그 때 도쿄가 지식네트워크 중심이 된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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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협력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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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46회 시리즈 기사의 키워드는 ‘기선’이었다. 부경대 HK 서광덕 교수는 18일 국제신문 20면에 실린 ‘기선을 타고 신문물을 배우러 가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과 중국의 일본 유학붐의 근간이 된 정기기선 항로의 내력에 대해 소개했다. 서 교수는 “중국인이 대규모로 동쪽으로 몰려간 일이 근대 시기에 다시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1896년 이후 전개된 중국인의 일본 유학붐.”이라면서, “처음에는 13명을 선발하여 보냈던 것이 점차 늘어 1902년에는 500명, 다음해에는 1000명, 과거제도가 폐지된 1905년에는 8000명, 최전성기에는 1만 명 아니 2만 명에 육박했다고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그 중에는 “중국 근대 문학가 루쉰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어떻게 일본까지 갔으며, 일본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서 교수는 “상하이에서 요코하마까지 가는 데 열흘이 채 안 걸린 사실을 통해 20세기 초 동북아해역의 해상교통이 급속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기선의 출현.”이라고 말했다. 그는 “루쉰이 난징에서 탄 오사다마루는 바로 장강(長江)을 가로지르는 중국연안항로를 운항하던 일본 기선회사의 배.”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일본우선회사와 함께 일본해운업계의 양대 축을 형성한 오사카상선주식회사는 1884년에 출범했다.”면서, “1890년 봄 오사카상선주식회사는 부산에 지점을 설치하고, 1890년 7월부터 오사카와 부산 사이에 기선 1척을 정기 운항했으며, 1893년에는 오사카-인천 항로를 개설하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따라서 루쉰이 난징에서 탄 배는 오사카상선회사 또는 일본우선회사의 배 가운데 하나였을 터이다. 부산과 일본의 부관연락선은 1905년에 산요기선회사에 의해 개통되었다.”고 덧붙였다. 서 교수는 “19세기 중반 동북아해역에서 속도와 안전 면에서 월등한 기선의 시대가 열린 이후 한중일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형성된 정기항로는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본 유학붐을 뒷받침하며 도쿄를 새로운 동아시아 지식네트워크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조선과 중국인의 도쿄로의 유학 러시는 18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청나라가 일본 유학을 정부차원에서 권장한 것은 청일전쟁에서의 패배가 계기가 되었다. 서양 유학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노력했지만, 같은 시기 서양을 배운 일본에게 서구식 해군으로 패전함으로서 일본의 선진 문물 수용의 비밀을 알고 싶었다.”면서, “그래서 도쿄는 일본화된 서구문물을 배우는 지식과 정보의 보고가 되었고, 이를 배우러 몰려드는 유학생들로 인해 근대 초기 동북아해역 지식네트워크의 중심이 됐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이것은 러일전쟁의 승리로 인해 일본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하는 등 여러 가지 요인에서 기인했겠지만, 남양항로를 포함한 중국과 일본 등의 다양한 정기항로 개설이 한몫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고 밝혔다.<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