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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박소슬 동문
작성자 대외협력과 작성일 2014-06-23
조회수 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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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이 뛴다|박소슬 동문
대외협력과 2014-06-23 3539

대학을 졸업한 뒤, 그대 스케줄은 어떻게 잡혀있는가? 취업? 대학원 진학? 아니면 창업? 그런데 졸업 이후 할  일 중에서 그 말고 어떤 매력적인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우선 박소슬 동문(parksoseul@gmail.com)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혹, 그대에게 갑자기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 박소슬 동문. ⓒ이성재 사진(홍보팀)
부경대 국어국문학과를 2013년 2월에 졸업한 2008학번, 올해 26살 아가씨. 자신의 외모가 한국보다 멕시코에서 더 인기 있는 스타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당당한 그가 며칠 전 부경투데이를 불쑥 찾아왔다.

졸업하고 지난 1년 동안 멕시코에 있었단다. 멕시코 동남부 유카탄 반도에 있는 ‘메리다’라는 도시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대학 졸업 후 으레 가게 되어 있는, 그러나 결코 쉽게 손에 잡을 수 없는 취업, 창업 또는 진학 같은 그 ‘홈 패인 길’을 그는 과감히 벗어났다. 훨훨 떠 멕시코 메리다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메리다가 어떤 도시인가? 그는 “영화 <에니깽>, 소설 <검은 꽃>에서 소개된 바 있듯이, 한인 멕시코 이민의 역사를 간직한 아름답지만 슬픈 곳.”이라고 말했다.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1,033명의 한인들이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이역만리 낯선 땅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멕시코였다. 그러나 그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지상 낙원이 아니라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니깽 밭이었다. 한인들은 에니깽 농장의 가혹한 삶 속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며 힘든 삶을 이어갔다. 그 한인 5세들이 자리 잡고 사는 곳이 메리다다.

그런데 박소슬, 그는 그곳에 왜 갔나? 그곳 멕시코 현지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그는 “현재 5세대까지 남겨진 한인 후손들은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어를 거의 모른다.”면서, “이들에게도 모국어를 가르쳐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인 후세들은 그동안 한국인임을 숨겨왔다가 최근 한류 붐에 의해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자신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단 한차례로 끝난 우리의 멕시코 노동이민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들과의 혼혈이 증가했고 민족의 정체성도 점차 상실했다.

그런 그곳에서 그는 지금 매주 10개 팀 50여 명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등을 통해 한국 손님이 오면 통역 일도 한다. 한인이민사박물관에서 번역 일을 하거나 각종 컨벤션에서 사회자로도 뛰고 있다. 이곳 메리다에 한국어학교를 세우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차근차근 키워가고 있는, 메리다의 유일한 한국인 선생님이 바로 그다. 대학 다닐 때 영어에 주눅 들었던 그가 영어와 스페인어를 습득하고 지금은 마야어까지 배우고 있다. 부경투데이와 구면인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점은 있다. 그에게 그런 터닝포인트는 언제, 어떻게 왔을까? 대학 3학년 때이던 2011년, 미국 교환학생 생활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고 한다. 영어 실력이 늘었고,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봄 방학을 맞아 그 때 알게 된 현지 친구들의 초대로 콜롬비아를 가게 됐다. 그는 “당시 친구들이 라틴아메리카는 낙후되고, 위험하다고 걱정하며 말렸다.”면서, “그러나 그런 선입견은 현지에 도착하면서 싹 가셨다. 나의 스타일이 한국보다 롬롬비아에서 더 인기가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웃었다.

그 후 부산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 중 한 명이 메리다로 초대했다. 그 곳에 한류열풍이 불고 있었다. 3학년 때 미국 캘리포니아에 ‘한국어 교육 시장 탐방’을 갔다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현지 한국어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메리다에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어디서, 누구에게 가르칠 지 막막했었다고 한다. 그는 메리다 시내를 헤매며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던 중 한 건물에서 아시아 물건들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한국 팬이었던 그 가게 주인은 그에게 자기 가게 앞이라도 좋으면 수업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는 가게 앞에 책상과 의자 4개를 놓고, 칠판은 주위에서 빌려서 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직접 명함을 만들어 돌리고 페이스북에 글 올리고 다양한 K-pop 모임에 직접 참여하면서 뛰었다.

언어소통도 문제였다. 그는 “멕시코인들과 영어로 소통이 거의 불가능해 UNAM대학교에 스페인어 강좌를 등록했다.”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영어도서관, 문화센터에 부지런히 드나들며 멕시코 친구들을 사귀면서 조금씩 스페인어 실력을 늘렸다.”고 말했다.

한류로 인해 현지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았다. 이 점은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는 수준이 되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니, 사람들이 ‘한국’과 관련된 일만 생기면 나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메리다에서 조금씩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대화를 하다보면, 그의 말은 쉽게 멈출 줄을 모른다. 몸 안에 꽉 들어차 있는 그만의 경험을 쏟아내기 바쁜 것이다.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가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의 대학시절은 어땠을까? 그는 학보사 기자였고 편집국장까지 역임했다. 부경대에 합격한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부경대신문사였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3년 동안 기자 생활은 기사거리 확보, 마감시간과의 싸움, 원활한 인간관계 유지를 위한 노력, 그리고 밤샘의 연속이었다.

그는 “학보사 생활은 힘든 일이었지만 보람 있는 시간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시사 주간지인 <시사IN> 주최 ‘제1회 전국 대학 기자상’의 학내보도상 1위를 받은 주인공이다. 당시 서울대, 중앙대, 이화여대 그리고 계명대 방송국과 함께 영남권의 유일한 수상자였다. 그 때 심사위원은 그의 기사를 “다른 기사들에 비해 참신하고, 완성도와 취재 자료의 제시가 상대적으로 우수했다”고 평가했다. 

수상은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는 “친구들이 자격증과 학점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학보사 생활을 고집하던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누르고 있었다.”면서, “그 때 기자상 수상은 ‘나는 내 미래를 다르게 준비할 뿐, 틀린 게 아니다’라는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고 말했다.

학보사 기자만 해도 바빴을 텐데, 그는 쉬지 않고 대외활동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자단, KT 실버봉사, 한국장학재단 총무, 외교통상부 해외안전여행 서포터즈, 부산일보 시민기자, 부산광역시 행복 세상 만들기 기자 활동 등. 그는 “성적은 나쁘지 않을 만큼만 받고, 할 수 있을 때 즐기고 내실도 쌓고 싶어서 많은 활동을 했다.”고 돌이켰다.

여행도 많이 했다. 지금까지 일본, 싱가포르, 미국, 멕시코, 쿠바, 벨리즈, 콜롬비아, 북한을 다녀왔다. 그 중 일본, 싱가포르, 미국, 북한은 부경대 국제화 프로그램 등 학교의 지원을 받으며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라틴아메리카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데 직접 부딪히면서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물론 어디서든 현명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철두철미한 습관은 해외여행의 필수.”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 교재 등 자료를 구입해 곧 메리다로 돌아갈 계획이다. 그에게 메리다란 어떤 곳일까? 그는 “이제 제2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다.”며, “그곳의 한인 후손들과 한국을 좋아하는 친구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메리다에서의 한국어 선생은 그가 정말 하고 싶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한국어 교사, 한국문화 전도사가 되고 싶다.”면서, “최종 목표는 제대로 된 한글학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힘들 때면, 그는 ‘알을 깨라’는 말을 되새긴다고 한다. 그는 “학보사 주간이시던 이상기 교수님께서는 늘 우리 학보사 기자들에게 알을 깨라고 말씀하셨다. 요즘도 이 말이 가끔 기억나는 것을 보면, 이 말에 영향을 받아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많을 것이다. 자꾸만 알을 깨고 가다 보면,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설레고 기대가 된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정을 품고 꿈을 향해 달리는 중인 그가 예뻤다.<부경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