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 뒷면의 이야기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04-16 |
| 조회수 | 535 | ||
|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 뒷면의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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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협력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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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열네 번째 기사의 제목은 ‘근대 상하이 거리 활보한 뜻밖의 한국 사람들’이었다. 뜻밖의 한국 사람들? 과연 누구를 말하는 걸까? 필자는 안승웅 부경대 HK 연구교수였다. 그는 4월 12일 국제신문 17면에 실린 이 글에서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우리가 간과했던, 그러나 기억해야할 ‘그날의 뒷모습’을 들려줬다. 그러나 안 교수는 “개인적 생계를 위해서, 혹은 큰돈을 벌고자 경제적 목적으로 상하이로 모여든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면서, “이들 중에는 친일 부역자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독립운동가를 전문적으로 감시하는 밀정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강화되자 많은 사람이 생계를 위해 국외로 이주해야 했다. 국내에서 경제활동이 위축됐던 상인은 국제적 상업도시로 명성이 자자했던 상하이를 택했다.”면서, “1910년 전에는 50명도 되지 않았던 한인이 30년대 초에는 8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증가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검열이 강화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상하이를 떠났다. 하지만 상하이의 한인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1932년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면서 상하이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해 일본 자본이 본격 상하이에 진출했고, 이와 함께 한인도 대거 따라 들어왔다는 것. 안 교수는 “1930년대를 기점으로 상하이에는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득세하는 형세가 이루어졌다.”면서, “일본이 상하이를 완전히 점령한 1940년대에는 이러한 구분도 사라지고 상하이에 남은 한인은 대부분 친일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상하이 거리에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한인들로 넘쳐났다는 것. 매판자본가, 친일부역자, 독립운동 변절자 등이 그들이다. 안 교수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도마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그는 조선총독부의 초청으로 고국을 방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찰에서 분향했고 다음 날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만나 사죄했다.”고 썼다. 그는 “(당시) 상하이에는 그야말로 매국노 변절자 파렴치한들로 넘쳐났던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직시해야 한다. 이들을 제외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영웅적 업적만 이야기하면 독립운동의 의미는 박제화되어 버린다.”고 강조했다. <부경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