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초 美 유학생’ 유길준이 유학에 눈을 뜬 계기는? | |||
| 작성자 | 대외협력과 | 작성일 | 2019-10-14 |
| 조회수 | 458 | ||
| ‘최초 美 유학생’ 유길준이 유학에 눈을 뜬 계기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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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협력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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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대학교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단장 손동주)과 국제신문 공동기획 <동북아 바다…인문학으로 항해하다>의 37회 시리즈 기사의 키워드는 ‘유학’이었다. 부경대 HK+사업단 서광덕 연구교수는 10월 2일 국제신문 20면에 실린 ‘학문 배우러 바다 건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선교사들은 종교를 전파하는 것이 최상의 임무였지만, 이문화 지역에 이를 보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면서, “그래서 이들은 신기하고 놀랍고 또 두려워할 만한 것을 같이 소개하여 이목을 끌었다.”고 말했다. 서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이리하여 “‘서양을 배우자’라는 분위기는 19세기 동아시아의 화두가 됐다.” 서 교수는 “동아시아 왕조 국가의 지배층이 두려워했고 부러워했던 것이 바로 서구가 지닌 위력이었고, 그 위력은 바로 해군력.”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청(淸) 조정은 1860년대에 강남제조총국(江南制造總局), 복주선정국(福州船政局),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 등 군사 및 조선공장을 속속 설립해 서양식 총포와 선박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부설학교를 세워 외국어와 기술을 가르쳤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서양의 군사, 외교, 법률 방면 전문가 그룹(이른바 각 분야의 서양인 고문)이 동아시아 해역으로 건너오고, 또 반대로 이를 배우기 위해 동아시아인이 바다를 건너 새로운 지식의 본고장으로 향해해 가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해외 유학이 시작된 것이다.”이라고 유학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동아시아인 가운데 처음 구미로 떠났던 이들은 대부분 관료였다. 동아시아 지역 국가의 정부가 외교사절단으로 또는 근대적 개혁을 위한 필요에서 이들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중국 최초 미국 유학생 용굉(容閎)은 1847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공부했다.”면서, “1872년에는 30여 명 중국 학생을 데리고 미국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유학생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 차원의 해외 방문 외에 이 시기에는 해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일이 제도화된다. 1872년 증국번(曾國藩) 등의 건의에 따라 미국에 매회 30명씩 120명을 파견해 의학 철도 조선 해운 광산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고, 2년 뒤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도 유학생을 파견해 제조, 항해, 군사훈련 등을 배워오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서 교수는 “일본 역시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1868)까지 10년간 막부와 번이 각각 사절단(7회)과 유학생 그룹(6회)을 구미로 파견했다.”면서, “우리 경우는 1883년 보빙사(報聘使)라는 사절단을 미국에 보낸 것이 처음이다. 이때 보빙사의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유길준이다.”고 했다. 유길준은 어떻게 유학의 눈을 뜨게 됐을까? 서 교수에 따르면, 노론계 양반 출신으로 과거를 준비하던 유길준이 진로를 바꾼 것은 당시 개화파의 산파였던 박규수의 집을 드나들면서였다고 한다. 서 교수는 “유길준은 박규수에게서 위원의 ‘해국도지’를 소개받고 경세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1881년 고종이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곧 신사유람단)에 참가하여 일본을 방문하고, 이 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했다. 1883년 귀국하여 7월 보빙사(報聘使)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소개했다. ‘우리나라 최초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이 자신의 유학 경험을 토대로 적은 기록이 바로 ‘서유견문’이다. 서 교수는 “조선은 좀 늦었지만, 중국과 일본은 19세기 중반부터 바다를 건너 구미를 방문하여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돌아온다. 여행기를 비롯해 귀국한 이들의 기록은 서양인들이 가져온 자료와 함께 동아시아 근대 지식을 형성하는 데 또 다른 통로가 되었다. 이렇게 수용되고 정리된 중국과 일본발 근대 지식이 다시 조선에 수용되었다.”고 밝혔다. |